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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리짱 Jun 07. 2024

프롤로그: 오늘의 과소비 26,090원과 자소서 지옥

오늘은 아침 7시에 일어났다. 백수 생활에 있어 아주 기념비적인 날이다. 밤낮이 바뀌어서 아침 7시에 잠이 들면 들었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모처럼 자소서를 완성해 제때 내고 싶어서 눈 딱 뜨고 일어났다. 나는 매우 느긋하고 꾸물거리는 성격의 소유자로 이력서+자기소개서도 거의 마감시간 직전에 내곤 한다.   


한데 웬걸, 오늘의 나, 그래봐야 쩌리짱이지만, 좀 멋졌다, 후후. 오후 3시가 원서 접수 마감이었는데 무려 2시간이나 남기고 1시께 제출했다. 이것도 기념비적인 일이다. 이번 시즌엔 원서 낸 게 세 번째인데 지난 두 번은 마감 시간 2, 3분 전에 겨우겨우 제출했다고. 


그러고도 서류전형은 둘 다 합격했는데,(면접 떨어진 얘기는 나중에 ㅠㅠ) 원래 육아휴직 대체 계약직은 가장 인기가 없는 편이라며? 지원자가 적어서 합격선에 든 거였나? 물론 내 자기소개서가 좀 뛰어났었을 수도 있다 ㅋㅋㅋㅋㅋ 아무튼 공공기관에서 3년 넘게 육아휴직 대체로 일해놓고, 그것도 몰랐던 내가 나도 참 신기하다. 모르는 것도 참 많은 나, 살아도 살아도 때가 묻지 않는 나, 온갖 일에 죄다 서툰 나. 그런데도 지금껏 용케 밥은 먹고 살아왔으니 참 다행이지 뭐야. 


아무튼 아침 7시부터 낮 1시까지 꼬박 6시간을 투자해(물론 간밤에 지원할 기관(나는 공공기관에만 지원한다)에 대해 좀 서치 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의 방향을 생각해 뒀다) 또 다른 육아휴직 대체 8개월짜리에 원서를 접수했다. 실업급여도 다 받았고, 실업 기간이 벌써 8개월째라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다. 



뤼튼, Cue:, 챗GPT 없던 시절엔 대체 어떻게 자소서를 썼나 싶다. 물론 얘네들이 내 자소서를 대신 써주진 않지만 내가 발로 쓴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말이 되게끔 정리해 주고, 살도 붙여준다. 가끔은 없는 에피소드도 만들어준다. 근데 그 근거가 분명 누군가가 웹에 올린 글에서 따온 걸 거란 말이지, 그래서 좀 찝찝한 마음으로 얘네가 가공한 걸 내가 또 가공한다. 그렇게 가공한 걸 얘들이 다시 가공해 주고, 그렇게 자소서 무한 지옥에서 한나절을 보낸다. 이것이 요즘 K-취준생의 제네랄 하고 스탠더드 한 하루랄까? 


그렇게 오전 타임에 할 일을 끝내고, 엄마가 집에 있는 관계로 허겁지겁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요즘 나의 아지트인 우리 동네의 자랑(내 맘대로 정함 ㅋ) 커다란 투썸 플레이스로 향했다. 40대 중반의 비혼녀가 백수가 되어 집에 나뉭굴고 있으면 부모님의 짐짝이 되었다는 뜻이고, 부모님은 이를 남부끄러워할 수밖에 없겠지, 이해는 한다. 


나도 나름 1년 치 생활비 선납하고 부모님 댁에 얹혀사는 건데... 왜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30대 중반에 발병해서(실은 그 훨씬 전이 었겠지만, 자각한 때가) 30대 후반에야 양극성장애 판정을 받았고 그래서 사회생활이 어려웠던 거란 걸 나는 깨달았는데 부모님은 도무지 인정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 없는 중견기업을 그렇게 하루아침에 때려치우진 않았을 거란 말이지. 그 이후로 겪은 경제적 풍파와 시련들 ㅠㅠ 을 생각하면 휴우. 


어찌어찌 잘 맞는 약을 찾았고, 4년 전엔 공공기관에 계약직으로 취직하고 3년 동안 무탈하게 다녔다. 심지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맘 편히, 뜻 맞는 동료들과도 잘 지내면서 보낸 최고의 회사생활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공공기관이 타고난 기질과 잘 맞는 걸로 결론 냈다. 이 나이에 사무직을 지원할 수 있는 곳도, 정년을 보장해 주는 곳도(물론 정규직, 무기계약직에 한해서지만) 공공기관뿐이기도 하고.


얘기가 샜는데, 여하튼 나는 한낮의 뙤약볕을 가로질러 투썸플레이스에 당도했다. 요즘 투썸플레이스엔 '1인 독서실석'이 있어 나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ㅋㅋㅋㅋㅋ 

'1인 독서실석'은 요렇게 생겼다. 왼쪽이 얼마 전에 처음 갔을 때 자리가 너무 좋아서 반해서 찍은 사진. 게다가 알바생들은 보이지도 않게 멀찍이에 자리가 있다. 나처럼 슈퍼 내향형인 사람에게 아주 그만인 자리. 이런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한 투썸 직원 아주 칭찬합니다! 그 직원 포상휴가 좀 보내주세요, 네? ㅋ 


오늘은 공휴일인 관계로 그 큰 커피숍이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1인 독서실석을 사수하지 못하고 그 옆에 3인석에 앉았다. 오른쪽 사진이 요즘 내가 반한 '떠먹는 베리쿠키 아박' 케이크와 디카페인 커피. 나 같은 백수가 이렇게 브랜드 커피 마시면서 호사로운 케이크를 먹을 때가 아닌데... 어제는 뚜레쥬르 빵이 너무 비싸서 마트 가서 2,500원짜리 삼립 빵을 한끼 식사로 사 먹은 나인데. 투썸플레이스에서는 이후로도 저녁 겸 샌드위치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그렇게 나는 투썸플레이스에서 장장 6시간 반을 앉아서(네, 카페 진상이 바로 저예요ㅜㅜ) 다른 공공기관에 낼 자소서를 구상했다-_- 긴 시간의 구상이 필요했던 까닭은 묵직한 녀석이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NCS를 보지 않는, 무기계약 행정직 자리. 아직 제출 마감이 4일이나 남았는데 내가 임시저장해서 받은 번호가 135번 ㅠㅠ 1명 뽑는데 내가 135번째 지원자라니. 물론 임시저장만 하고 최종제출은 안 하는 사람과 허수들이 많을 테고 이래저래 한다고 해도, 휴우. 


맘을 비웠다. 그렇지만 열심히 안 쓸 수도 없고 해서 진짜 열심히 쓰고는 싶은데 아니 무슨 질문이 8개나 된다. 그중엔 경력기술서와 직무수행서도 포함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그렇죠?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지지 않나요?ㅜㅜ 내가 주말엔 편의점 알바가 있고, 월요일엔 우체국물류지원단 알바가 있다. 이거랑 다른 기관 거 2개를 다음 주 화요일까지 마감해야 돼서 마음이 아주 급한데 진도가 안 빠진다 이 말씀이야 ㅠㅠ 


겨우겨우 우격다짐으로 '지원동기' 500자 소설을 만들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135번이란 숫자가 벼락처럼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간 자리, 그래선지 동력이 사그라들고 있다. 

 

힘내자고 배가 부른데도 동네 롯데마트에서 카스 제로랑 5천 원짜리 장어덮밥을 사가지고 왔다. 장어보다 밥이 훨씬 많았지만 찰밥이어서 맛있게 냠냠 잘 먹었다. 그래서 오늘의 과소비는 온통 식비로 26,090원이다. 엊그제 마켓컬리 물류 알바 가서 하루종일 일하고 78,000원 벌어 왔는데ㅠㅠ 요즘의 내 형편엔 집에서 카누만 마셔야 하는데, 난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럭셔리하게 구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절약 노하우 같은 건 아얘 키우질 않았다. 수중에 있는 돈을 펑펑 쓰고 났더니 저번 달부터 이렇게 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생활비는 벌어야겠기에. 새로 산 i7 데스크톱과 모니터와 키보드와 마우스가 번쩍이면 뭘 하는가, 다음 주에 낼 카드값 36만이 모자라 왕복 4시간 거리의 물류센터에 가서 일용직 알바를 뛰는데. 인생,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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