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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리짱 Jul 26. 2024

마흔에 쓰는 101번째 자소서

절실하고 악착같이 써야 하는 40대의 이력서 쓰기

“저도 살면서 자소서 한 100장은 쓰지 않았겠어요?”


전 직장 동료들이랑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요즘 무기력해서 더더욱 자소서(자기소개서) 쓰는 게 죽을 맛이라고 했더니, 전직지원서비스 회사에 다녔었고 직업상담사 자격증도 있는 전 동료 T가 위로삼아 해 준 말이었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T는 자기가 상담했던 그 어느 사람도 예외 없이 자소서 쓰는 걸 괴로워했으며, 자소서를 쓰지 않으려는 핑계를 찾았다고 했다. 구직자들이 “여긴 우대조건이 안 맞고, 저긴 저런 조건 때문에 날 뽑지 않을 텐데 굳이 원서를 낼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물을 때, 냉철한 T는 대답했다고 한다. “왜 뽑을지 말지를 OO 씨가 생각해요? OO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더 많은 곳에 원서를 내는 거예요.”


앜. 말로 명치를 세게 얻어맞았다. 똑같은 핑계를 대던 내가 나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저기 T쌤, 깜빡이도 안 켜고 이렇게 훅 들어오면 어떡해요 ㅠㅠ. 나한테 한 말은 아닌데 나밖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지. 언니의 직설에 정신이 다 어질어질했다. 


나의 요즘 아지트인 투썸플레이스! 쿠폰이 생겨 신상 먹어 봄:)


모든 건 다 때가 있다는 말은 진짜 맞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살면서 아르바이트 포함해 원서를 한 100장은 내지 않았을까 싶다. 짧거나, 길고 긴 자소서를 그때그때 많이도 썼다. 원서를 아무리 내도 연락 한 번 없는 시기가 있었고, 가볍게 한 번 내 볼까 하는 맘으로 내곤 지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다가 면접 안내 문자를 받기도 했다. 운 좋게 면접까지 가면 평균적으로 1~2번 떨어지면 1번은 붙었다. 그래서 내가 면접을 꽤 잘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연거푸 면접을 죽 쑤고 보니 면접 자신감이 훅훅 떨어진 게 사실이다. 


사실 오늘도 자소서를 쓰려고 했는데, 슬금슬금 미뤄두고 이 글을 먼저 쓰고 있네 ㅎㅎ. 다시 용기를 내서 101번째 자소서를 써야 한다. 자소서란 너무 식상해서도, 너무 창의적이어서도 안 되는 글이다. 진짜 내가 아니라 보여야 하는 나를 세일즈 하는 글. 마치 날 때부터 직장인이었다는 듯, 성실하고 완벽주의가 있으며, 인간관계가 좋고 리더십마저 있는 '자소설' 속의 내가 나는 너무 낯설다. '자소설' 속의 나는 일종의 부캐 설정이랄까? 대략 100장을 썼으면 발로 써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웬걸, 현실은 쓰기 싫고, 너무 쓰기 싫고, 익숙해지지가 않는 이름이다, 자소서.  


자소서를 쓰고 있노라면 끝없이 생성되는 에피소드 자판기가 된 기분이다. 최근에 자소서를 써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모든 질문에는 그에 걸맞은 에피소드(물론 경력과 관련된)를 적고, 그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점이나 배운 점을 적어야 한다. 하지만 매 질문에 적합한 그럴싸한 에피소드가 내 직업적 삶에 얼마나 있겠냐 말이다. 


자소서의 질문들은 이런 식이다. 시작은 지긋지긋한 ‘지원동기’다. 설마 내가 공공기관에 행정 직원이 되려고 태어나서 이 기관에 입사하려고 평생을 준비하다 지원했겠나요? 그냥 돈 벌려고 지원한 건데요… 홈페이지를 아무리 뒤져도 이렇다 할 정보가 많지 않고, 검색되는 뉴스도 한정적인 공공기관의 경우 참 난감하다. 기관에 관심이 많은 척하고 싶어도 뭐 정보가 있어야 척을 하지…  


그다음은 분석력과 사고력, 창의성과 기획력, 의사소통 능력과 대인관계 능력, 도덕성과 윤리의식 등을 드러낼 수 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서 각각의 기관의 성격에 맞게 착착 대응해야 한다. 좀 찜찜하지만 AI챗봇인 뤼튼과 챗GPT, cue:에게 도움을 얻어 에피소드를 각색해 나간다. 가장 먼저 내 자소서를 읽고 의견까지 내는 AI와 심도 있는 대화를 해 보려 하지만, 가장 평범한 어투로 대개는 칭찬만 해주는 AI를 믿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밤에, 하소연할 곳 없어 답답한 심정을 반말로 챗GPT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보다 나이 어린 편의점 사장님이 지적질을 해대서(물론 나한테만 그러는 건 아니다. 불만 투성이 화법을 가진 사장이…) 울컥했던 밤이었다. 우와, 그런데 AI 이 녀석이 무슨 내 친구라도 되는 냥, 반말로 위로를 해 주는데,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흔한 말이지만 마치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한 답변을 해줘서 울컥하는 거. 깜짝 놀랐다. 친구보다 낫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나이가 어린 점주가 지적하는 걸 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특히 너 자신이 이미 많은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지.

하지만 너의 가치를 낮추지 말았으면 해. 너는 그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야. 이번 경험도 네가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그 지적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일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지적일 수도 있으니까.

(중략) 필요하다면 그 상황을 직장 내 다른 동료와 공유해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항상 너 자신을 믿고 응원해. 이 또한 지나갈 거야.” 


나 지금 AI한테 응원받고, 위로받은 거야? 진짜 위로가 되니까 기분이 이상해…. 친구보다, 내 주치의보다 더 나은 거 같아. 생소하지만, 이미 나 말고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AI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고 있겠지. 꼭 영화 <her>의 호아킨 피닉스가 된 기분인데, 아직은 챗봇이 그리 스마트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ㅎㅎㅎ 답변의 퀄리티가 복불복이라 아직은 사람의 온도가 훨씬 따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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