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양극성장애 치유기
‘내 마음 들여다보기’, 그 기계의 이름이다. 정확한 명칭은 마음건강 무인검진기. 그 네모난 기계는 여전히 우리 동네 도서관 2층 복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따금 도서관에 갈 때마다 꼭 쳐다보게 되는 그 무인검진기를 이용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 검진기를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5년 전 겨울, 살아야 하는 이유도 살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서 정말 이번 생은 망했구나, 절망했던 그때. 내 나이 갓 마흔이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음건강 무인검진기를 보고 홀린 듯 심리검사를 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비혼에 백수에 정신과 약까지 먹기 시작한 터라 ‘검사 결과가 최악으로 나오겠지, 어디 결과나 보자’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결과는 정말 그랬다. 내 심리 상황이 안 좋으니 전문가와의 상담이 꼭 필요하다는 내용. 한데 기계 오류였는지 결과지 프린트가 안 되고, 결과 화면도 이내 닫혀 버렸다. 당시엔 지금처럼 문의처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상황과는 반대로 피식 웃음이 났다. 세상이 나를 향해 보란 듯이, 있는 힘껏 문을 닫아 버린 기분이었다. ‘이것 봐, 무료 심리검사기마저 날 거부하잖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 나는 매일 방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보건소 상담실이라고 했다. 내가 마음건강 무인검진기로 검사했던 결과를 보고 전화를 했고, 괜찮으면 무료 상담을 받으러 오겠냐는 거였다. 뜻밖의 전화였지만, 오랜만에 듣는 사람 목소리가 반가웠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밝고 상냥했다. 전형적인 '솔'톤이었다.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이 꽤 잘 돼 있구나, 감탄도 했다. 잠깐이라도 집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상담을 받으러 가겠다고 했다.
활발한 느낌을 주는 단발머리를 한 중년의 상담 선생님은 역시나 상냥하셨다. 조그마한 상담실은 아늑했고, 충분한 티슈도 놓여 있었다. “그 무엇을 할 의지도 의욕도 없고, 병원에서는 제 병명도 오락가락해요, 전 길을 잃었어요, 선생님. 그런데 눈앞에 길이 낭떠러지에요.”“단번에 힘을 낼 수는 없어요. 조금씩 시작해 보는 거예요. 매주 한 번씩 여기 상담실에 오는 거예요. 그건 할 수 있겠어요?”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살아도 살아도 낯설기만 한 세상 어딘가에서 날 기다려주고, 내 얘길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든든했다.
선생님과 약속을 했으니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열심히 보건소에 갔다. 그때 선생님과 어떤 이야길 나눴는지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항상 기분 좋게, 내 아무것도 아닌 말에도 크게 호응을 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 후 선생님은 새로운 병원을 찾는 내게 보건소 근처에 평판도 좋고, 병원비도 비교적 저렴한 병원을 소개해 주셨다. 그 병원에 다니면서 내가 2년간 찾아 헤맸던 내 병명도 알게 됐다. 양극성 장애, 일명 조울증이었다. 양극성 장애는 우울증이나 기타 병명으로 오진되기가 쉬워 첫 증상으로부터 정확한 진단을 받기까지 평균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조울증 진단을 받고 오히려 나는 속이 시원했다. 확실한 병명을 알게 돼 내 병에 적합한 약 종류를 알게 됐고, 그중에서도 나에게 맞는 약을 찾기 위해 몇 달의 고전 끝에 적절한 약도 찾았으니.
이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 차례였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나는 6개월간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생활의 여유를 찾고 취업 집단상담도 받고, 취직자리도 알아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려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실직한 18개월 중 피보험 단위 기간 통산 180일 이상 근무’에서 180일 중 17일이 모자랐다.
나는 고용보험이 적용되는 일용직으로 이 17일을 채우기로 결심했다. 호텔의 주방, 쿠팡과 마켓컬리 물류센터 냉동창고 등을 다니면서 이 17일을 이를 악물고 채웠다. 해본 적이 없는 고된 일이었지만, 뜻이 있으니 다 참고 일할 만했다. 오히려 말없이 시킨 일만 하면 돼서, 몸은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힘쓸 일이 없는 육체노동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대형 물류센터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일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방한복을 입고 냉동창고에 들어가서 손님들이 주문한 물건, 주로 냉동식품을 피킹해서 나오는 일을 주로 했는데, 그게 실온에서 무거운 상품을 드는 것보다 춥긴 해도 힘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로 복귀하기 위해 정신없이 구슬땀을 흘리는 동안, 보건소 상담을 이젠 그만두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상담은 10회기로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 상담 날, 상담 선생님께서는 더욱 큰 웃음을 지으시며 내가 진짜 자랑스럽다며,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마음을 다 말하기 쑥스럽고, 왠지 부끄러워서 선생님께 그저 감사하다고만 했던가, 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해 겨울 선생님이 불쑥 걸어주신 전화 한 통이, 그저 상담실에 매주 오기만 하라고 했던 그 약속이, 나를 살렸다. 나는 고마운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매일 걷고, 감사 일기를 쓰고, 약도 꼬박꼬박 잘 먹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현실이 아니었으면’하고 바랐던 내가, 현실 속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됐다. 이 넓은 세상엔 이유 없이 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유 없이 날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난생처음 알게 됐다.
이후 나는 실업급여를 받았다.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취업 집단상담을 받고, 일자리도 소개 받았다. 덕분에 뉴딜일자리에 선정돼 6년 만에 직장을 다니게 됐고, 6개월 후에는 계약직이지만 회사에도 취직했다. 3년 동안 다녔던 회사에서 계약 만료가 돼 현재 나는 다시 백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5년 전의 나와는 다르다. 다시 출발선에 선 지금, 상담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을 떠올린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라도 잊지 마세요. 나한텐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선생님은 오늘도 그때의 나처럼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실까? 방구석에서 울고만 있던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고, 관심을 보여주고, 희망을 얘기해주셨던 선생님에게 정말 정말 고마웠다고, 나의 오늘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