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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Mar 30. 2024

시간을 나는 드론 (10)

숭유억불에 대한 조그만 생각 (2)

과거제, 지배계층의 수적 우위


과거제는 고려 대부터 존재했다. 다만 고려의 과거제는 탑티어 정치 엘리트를 뽑기 위한 것이었고, 조선의 그것은 지금의 공무원 시험의 목적과 유사했다. 초중반 고려의 지배계층은 건국공신의 후손들이거나, 각 지방호족들 또는 그들의 아들들이거나, 또는 왕실의 가족 혹은 왕씨 성을 하사받은 사람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봐고 될 듯 하다. 이들과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오직 능력으로 그들을 이겨먹어야 하니, 고려의 과거제는 시험 그 자체보다 훨씬 높은 난이도를 가졌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시험을 통과하여 고려 벼슬체계에서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은, 적어도 그들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그들도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것이 그들의 능력을 입증하는 첫걸음이 될 터인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탑급 엘리트라 하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기획하고 입안하더라도, 그것이 채택되기 위해서는 다수 관료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과거제를 통과한 사람들은 애초에 그 수가 너무 적다. 결국은 기존 지배계층과 손을 잡아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거래가 오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변화 혹은 개혁을 위한 정책은 좌초될 가능성이 너무 높은 구조다. 


지배계층의 균열 혹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고려시대는, 왕실의 비호를 받은 신진 세력이 나타나거나, 해당 지배계층 내에서 세력다툼이 일어 서로 싸우다가 빈틈이 생기면서 자멸하거나, 또는 외적의 침공이나 대형 반란이 발생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부 세력이 쓸려나가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는 정도의 상황이 필요하다. 그냥 읽기만 해도, 쉽게 발생할 만한 정황이 아니다. 기존 세력들이 다 바보는 아니라, 그 정도 세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흘러가는 중에도, 균형을 유지하고 세의 연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위와 같은 적절한 환경은 쉽사리 만들어지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계급제는 고이고 썩기 마련이고, 이 아래 민초들과 다른 피지배계층의 분노는 알게 모르게 쌓여간다. 이것이 일정 수준에 달하면 사회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이는 결국 지배체계의 혼란과 외적의 침략 가능성 상승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통일신라(왕실과 호족)와 고려(무신, 권문세족, 그리고 일부 불교귀족), 그리고 조선(붕당, 권문세족)의 말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고려 말기, 남아있던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킨 신진사대부는, 이런 흐름을 모를 리 없었다. 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과거제는 엘리트 뿐 아니라 국가의 거의 모든 관리를 고용하기 위한 절차가 되었다. 물론, 조선에도 고려대의 권문세족에 준하는 중진 가문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건국 초기 사병이 혁파되며 그 세의 기반이 크게 꺾였다. 세력의 대물림을 위한 음서제가 존치되었으나, 음서제 출신 관리가 과반수라면 모를까, 이미 관리의 대부분이 과거를 거쳐 들어온 상태에서는 가문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활개치기에는, 적어도 건국의 기세가 남아있던 조선 중기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부 유학자들이 지방에 터를 잡고, 일부 사학을 기반으로 세를 키우고, 특정 성씨의 친족을 바탕으로 벼슬길을 움켜쥐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에는, 그들이 혐오했던 고려의 권문세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


불교귀족, 권문세족, 그리고 세수


국가의 개념이 잡히기 이전부터,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은 존재했다. 그것이 왕이 아니라 작은 읍락의 촌장일지라도, 해당 마을에서 일정량을 거두어 공공의 수요를 위한 비용으로 충당했을 것이다. 시스템이 국가 단위가 되면, 해당 서비스의 비용에 대한 지출 뿐 아니라, 수입에 대하여도 체계를 필요로 한다. 비단 현대의 정부 뿐 아니라, 이는 고대국가부터 존재했던 것들이다. 


화폐가 도입되고, 널리 쓰이고, 이 화폐로 조세를 거둔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니었다. 보통 생산물로 받았다. 조선시대 대동법이, 바로 이 조세를 쌀로 단순화한 것이다. 즉, 쌀이라는 화폐로 통일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 생산물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그 총량 대비 일정 비율로 조세를 거두었다. 왕조가 바뀌어도, 해당 지방관이 썩어빠지지만 않았다면, 실질세율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삼국시대, 즉 삼한시대 소국들의 경우라면, 수도 기능을 하는 읍락과 그 주변 영토가 다였다. 따라서 세수를 관리하는 것이 큰 품이 드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토가 차츰 넓어지고, 각 지방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 또는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아 온 호족과 손을 잡고, 또는 지방 곳곳에서 개간하여 자신들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영농들을 만나는 등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생산량을 관리하고 세수를 계산하여 중앙정부로 운송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게 되었다. 


중앙에서 군사로 정벌한 곳은 지방관을 파견했을 것이고, 현지의 향리들과 함께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경우는, 지방의 실력자들을 신뢰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그들이 개척한 땅일수도 있고, 과거 자신들의 선조가 녹읍 등을 받아서 해당 지역이 그들의 터전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토지들은 그들의 땅을 경작하고, 그 땅 주인에게 소작료를 지급하는 소작농들에 의해 운영된다. 그 소작료의 일부를 세수로 하게 된다. 중앙에서 관리하는 담당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온전히 지방 호족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중앙의 행정력이 충분히 강하고, 왕권도 충분히 강하다면, 지방의 세수 확보의 과정이 순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경우, 이 지방 세수에 구멍이 뚫릴 가능성이 너무 높다. 지금처럼 전산처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지방관들이 호족들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행정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낮다보니, 중앙은 점차 가난해지고, 지방(의 세도가들)은 도리어 부유해질 확률이 높다. 국가에 직속으로 등록된 자영농이 줄어든다면, 특히 이들이 주변의 호족들에게 흡수되어 소작농이 된다면 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된다. 


고려후기 융성하고 강대해진 불교귀족(?)과 권문세족들이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일 것이다. 불교는 전국 각지에 위치한 각 사찰의 경영을 위해 주변의 농지를 보유했다. 권문세족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공로로 인해 받은 식읍을 기반으로 해당 지역의 거대지주가 되었다. 그들 둘 모두 야금야금 주변의 농지를 흡수했을 것이고, 사병이 허용된 고려의 특성상, 많은 사병과 소작농, 일꾼을 포함한 많은 인원을 경영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인원은 더 많은 식량의 축적을 요구하고, 이는 더 많은 농지를 수요한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중앙정부로 직접 들어오는 세수는 줄고, 결국 귀족들의 눈치를 보아야 할 필요가 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펴거나 더 많은 편의와 혜택을 주지 않으면 거의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또는, 왕권의 위협도 고려해야만 한다. 왕권은 지켜야 하니 귀족들의 세는 점점 더 커지고, 외적의 침입도 중앙군의 세가 작으니 사병을 거느린 귀족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공짜는 없다. 전쟁은 더 많은 녹읍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백 년이 채 되기 전에, 고려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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