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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Apr 13. 2024

시간을 나는 드론 (12)

숭유억불에 대한 조그만 생각 (3)

조정, 향리, 사찰, 그리고 백성


조선의 지배체계는 성리학이다. 동시에 불교를 배척했다. 그러나 국가 전체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국가의 정책 사조와 사관들을 포함한 관리들이 불교 세력을 배척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관리들은, 적어도 조선 시대에는 모두 남자였다. 모든 남자도 아니다. 신분제로 대부분의 평민과 노비를 제외하고, 양반 중에서도 많은 서얼을 제외한다. (*평민과 서얼은 대과를 치를 수 없지만 그 외의 과거는 응시가 가능했기 때문에, '모두'가 아닌 '대부분' 또는 '많은'의 표현을 사용했다.) 


백지 상태에서 성리학과 불교를 선택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불교가 전 국토, 전 백성의 삶 한가운데 침착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리학이 들어와 이런 불교를 걷어내려는 것이다. 주요 지방 관리들은 중앙에서 파견되고, 이들 대부분은 대과를 통과한 인물들이었으므로,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중앙 출신 관료가 직제가 높다하나, 실질적인 업무는 각 지역의 향반과 향리에 기댈 수 밖에 없다. 향반은 지역 사학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집안인데 반해, 백성들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대대로 해당 지역에 토착하며 살아온 향리들은 성리학자라 보기 어렵다. 


백성의 절반은 여성이다. 단지 평민과 노비만이 아니라, 위로 왕족도 마찬가지다. 왕의 부인인 왕비를 포함한, 왕 본인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보이는 경우는 조선 역사 내내 정말 많이 발견된다. 여기서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단지 스탠스를 불교 친화적으로 잡는 정도를 넘어서, 불교의 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평안과 평상시의 안정을 위해 사찰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정도는 되었다.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다. 애초에 건국주가 사찰의 행사들을 놓치지 말고 잘 챙기라는 것이 유언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니 두말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불교는 절기별로 큰 법회가 많은데, 국가에서 주도하여 챙겼으니 그 화려함과 성대함은 엄청났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과 달리 사찰들의 대부분은 마을에 인접하거나 마을의 한가운데 있었다. 비유가 적절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많은 중동 국가들의 도시들과 그 한가운데 화려하게 위치하는 모스크, 그리고 도시 곳곳에 수없이 배치된 기도실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루에도 여러번씩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나와 특정 방향을 향해 엎드리고 도시 전체가 이슬람 성전의 음악(?)으로 덮인다. 


아마도 고려시대 많은 마을과 성읍은 곳곳에서 많은 스님들의 목탁 소리가 가득하고, 시주를 구하거나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발걸음이 도시 곳곳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각 지역을 관할하는 주요 사찰에는 대형 스님(?)들이 상주했을 가능성이 높고,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찰에 많은 시주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정분리의 시대이지만, 불교 국가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불교문화가 수백년에 걸쳐 꽃을 피우기 좋은 환경이 되고, 이는 백성들의 삶에 문화적 기반으로 흘러들어가 뿌리박히게 된다. 


관과 민의 재화가 사찰로 흘러들어가기만 하면 국가가 굴러가지 않는다. 저렇게 받은 재화로 각 사찰들은 지역의 구휼에 힘쓰고 지역의 호족과 향리들과 협력을 갖추어 각 지역의 치안 및 방어에 힘을 보탰다. 지역마다 폭넓게, 그리고 촘촘히 위치한 사찰들이 큰 비리 없이 신뢰감을 높게 형성하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이 불교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보여주기만 하는 것으로도 영토 구석구석까지 지배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와 조정 간의 give and take가 적어도 고려 초중반까지는 잘 이루어진 것 같다.


다만, 고려는 조선과 달리 지방 곳곳에까지 중앙에서 관리를 내려보내 직할하는 체계는 아니었다. 관리를 내보내기는 하지만 지역의 향리들의 권력을 꺾고 중앙 일원화된 행정을 피기보다는 그들의 행태를 감시하고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통제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조정으로의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협력을 위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선해보이는 싸이클의 맹점은, 각 지역의 향리, 불교계, 그리고 조정 셋 중 하나라도 공리를 최우선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바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향리는 국가에 소속된 기간보다 훨씬 오랜 기간 해당 지역 유지로서 존재해 왔다. 고려라는 국가가 생기고 왕에게 충성을 표시했지만 중앙의 힘이 충분하지 않거나 혹은 그들에게 확실하고 거대한 이득의 기회가 발생할 경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기만하고자 할 가능성이 생긴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아무래도 지역 토착민 출신인 향리들에 비해 지역에 어둡고 지역민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멀다. 눈귀가 가려지기 딱 좋다. 


고려 조정은 초중반까지 잘 버티다가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이는 이미 중앙의 행정과 법치가 무너질 만큼 무너진 상태였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러다가 원(몽골)의 침략이 발생하고, 공민왕이 개혁을 부르짖었다가 말년에 그 유명한 신돈이 등장한다. 불교계의 부패와 향락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셋 중 하나라도 벗어나면 무너질 시스템인데, 고려 중후반기부터 셋 모두가 함께 정상적인 때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부패한 불교계에 대한 배척은 신진사대부를 필두로 한 지배계층이 제일 선두에 서 있었지만, 실제로 삶이 피폐해지고 있던 백성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주가 더 이상 자발적인 시주가 아니라, 가진 것이 없어도 뺏기는 공물 같은 것이 되고, 또 황폐해지든 말든 간에 관리들은 불교계와 척을 지면 안되기 때문에 법회는 또 화려하게 해야 한다. 시주를 내지(?) 못하게 되면 땅문서를 담보로 잡히고, 이것의 결말은 열 중 최소 여덟은 땅을 뺏긴다. 땅이 계속 쌓이면 사찰은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부리게 되고, 공의로운 사찰이라면 상생을 도모했겠지만 부에 눈이 먼 당시의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횡포가 계속되면, 백성들은 조상대대로 뿌리박혔던 불교와의 고리를 끊어내려 할 것이고, 방랑 혹은 유민의 수가 늘어난다. 자영농이 줄면 조정의 세수가 흔들린다. 사찰의 전답이 늘었으니 생산량이 늘었을 것이고, 그러면 사찰이 내야 하는 조세가 늘지 않겠는가 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 사찰 상당수는 부를 향해 달려가는 이익집단 그 자체였다. 어차피 법회 등등의 핑계로 사찰은 재화의 대부분을 착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정으로의 세수가 줄면 조정이 할 수 있는게 줄어든다. 먼저, 양병하고 유지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가 줄어든다. 중앙군이 줄면 결국 사병제도가 유지되던 고려는 사병을 가진 여타 귀족들에게 권력을 나눠줄 수밖에 없다. 또한 조정이 필요로 하지만 유지할 수 있는 관리의 숫자가 줄어든다. 관리의 수를 줄이지 않으면 결국 관리에게 지급하는 삯이 줄어들게 되고, 해당 관리들은 결국 자신들의 자산(토지)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는 해당 지역의 자영농을 또 줄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지역 향리를 끼지 않고서는 어렵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더 상실하게 된다. 악순환을 끊을 만한 소재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건국과 숭유억불


여느 다른 왕조들과 다르게, 조선의 건국은 그 주도 "세력"이 건국자 일인과 그 추종자들에게만 돌아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태조 이성계와 그 아들들, 그리고 정도전과 남은 등을 위시한 참모들이 국가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조선조 초기를 이끈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학을 기반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기본적으로 주요 정치세력 간에 왕권과 관리들이 서로 견제하는 형태가 그 시스템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정치세력간의 견제, 그리고 그것이 정쟁이 되고,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며, 피바람을 불러오는 것이 일반적인 새 왕조의 역사이다. 초기 왕권의 급속한 안정을 위해 많은 결혼을 하게 되고, 그 외척들은 이미 힘을 가진 호족이거나 귀족일 가능성이 높지만, 외척이 되고 나면 내노라하는 실권자로 발전하게 된다. 국가의 건국주는 원래 힘이 강하다. 그렇기에 건국주가 정정할 때는 충직하고 능력있는 신하로서 임하지만, 그의 나이가 들고 총기를 잃어감과 동시에 후계자 각각을 놓고 그들의 실력행세가 시작된다. 


혼란한 시기에는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짙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권세를 누리던 귀족들에 대항하여, 많은 유학자들이 일선에 나섰다. 신진사대부들의 당대 스승 격인 목은 이색부터, 포은 정몽주, 정도전, 남은 등 이성계의 참모진과 호종 하륜, 권근, 황희 등 이방원의 참모진을 모두 포함한다.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고, 신돈은 몰락했고 불교의 세도 많이 줄었지만, 태조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왕의 스승, 즉 왕사로 무학대사가 임명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성혁명이 일어나면서 국가를 바꿔 앉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신진사대부들도 갈라졌다. 그 시기 고려왕조에 대한 충을 내세워 저항하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게 숙청을 당한 포은 정몽주, 그리고 당대 사대부들의 성리학 스승이었던 목은 이색 등은 고려조를 선택했고, 그 유명한 정도전과 남은, 조준, 하륜 등은 조선조를 선택했다. 정도전은 급진적인 개혁가였고, 조선조에 이르러 수많은 시스템을 닦는 중심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많은 성리학자를 뚫고, 당대 불교계의 거두 중 하나였던 무학대사가 조선시대 유일한 왕사로 임명되어 조선 초기 정국에 제한적으로나마 참여한다.  


왕조의 초기가 안정된, 또는 왕위 계승이 비교적 평화로운 왕조들은 비교적 초반에 피바람이 부는 경우가 많다. 공신들 내에 만연한 파벌을 이용하여, 외척과 엮어서, 일종의 거대 귀족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후대에 걸쳐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왕위를 이어나가기 위한, 초대 왕의 칼춤이다. 조선은 건국주인 태조 이성계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패했다. 고려를 무너지게 한 권문세족(*고려대의 권세가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공신록과 왕가의 권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귄세가들이 들어서고 있었다)이 다시 조선에 시작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불교계의 전횡을 완전히 끊어낼 만한 무엇인가를 하지 못했고, 또한 다음 왕권 안정을 위한 대처도 미흡했다.


조선의 첫번째 왕은 태조 이성계이다. 분명 그는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무인이었다. 옛 것을 폐한 사람이 새 것을 채워넣는 것도 잘할 필요는 없다. 새 것을 채워넣은 사람은 바로 그 정도전과 그를 위시한 많은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더 이상 고려와 같이, 중앙과 지방의 협력으로 굴러가는 국가가 되지 않기를 원했다. 중앙정부는 강력해야 하고, 영토 구석구석 조정의 명령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야 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도전의 그 구상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대부분 수백 년, 길게는 천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백성들의 삶에 아주 깊은 뿌리로 남아 있었다. 호미나 삽으로 살살 긁어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지방 곳곳마다 향교를 세워(*각 지역에 산재했던 사찰을 폐하고 향교로 재개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강제적으로 유교적인 삶의 방식과 형식을 주입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수많은 사찰을 폐쇄했다. 민가에서 가까운 순으로 폐쇄했을 것이고, 따라서 산중 깊숙히 자리한 사찰들 위주로 살아남게 된다. 동시에 사찰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재정 지원을 다 끊어버린다. 사찰들은 진짜 자발적인 백성들의 시주와 사찰에 귀속된 일부 토지를 통해 재정을 충당해야만 하는 시절로 돌아갔다. 스님에 대한 처우도 좋지 못했다. 귀히 대접받던 시대는 가고, 괜히 끌려가 부역에 징발되거나 곤장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스님들의 운신은 자동적으로 제약을 받았고, 사찰의 접근성도 매우 제한되었다. 대부분의 양인은 농민이었고, 따라서 쉴 날이 없다. 농번기는 농번기대로 바쁘고, 농한기는 각종 부역이 시작된다. 산속 사찰에 가려면 최소한 하루를 빼야 한다. 중심 노동력인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과 아이들이 주로 사찰과 연결고리가 생겼음은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찰을 향하는 재정은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의 과거는 조선 조정에서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관리를 충당한다. 지방 수령은 대과에서 최상위 득점자들이 일차적으로 배치받는 벼슬이 된다. 관찰사 같은 각 지역의 총책임자는 왕과 충분히 친밀한 사람들이 내정된다. 중앙집권적 체제에 대한 강한 지지다. 게다가, 태종 초기, 사병이 혁파되었다. 그 과정에서 외척을 포함한 많은 권신들이 사라져갔다. 권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각자의 고향을 위시한 지방에 녹읍 중심의 넓은 봉토를 가진다. 이것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지역의 향리와 유지들을 이용한다. 사병 및 권신혁파는 결국 지역의 유지와 향리들의 힘이 자동적으로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귄신들의 봉토는 소작농에 의해 경작되므로, 추가적으로 자영농의 비율을 늘려 조정으로의 세수를 확보하고 경제력을 통한 민심 확보로 이어진다. 이 모든 정책들은 불교가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계와 연결될 만한 고리를 최대한 끊어내고 재정을 마르게 하여 불교가 조선 사회에서 갖는 포지션을 최대한 낮추는데 기여하게 된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고려시대까지 한반도의 불교는 융성했다. 일본쪽으로 고승이 방문해서 기술이나 글 같은 것들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대에 이르러 한반도의 불교는 거의 사장되었다. 융성하고 화려했던 불교 문화는 청렴을 내세우는 유가사상에 짓밟혀 유물과 기술이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무학대사가 조선시대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였고, 정사에 남은 무학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함은 실제 그의 행적이나 명성보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좋지 않은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불교가 계속 사회의 중심이던 일본이 불교 문화와 연구에 있어 한반도를 앞서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이다. 사찰은 각 지역에서 토착화되어 있었고, 지역 맞춤형으로 농업기술과 각종 정보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 기록은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불교 문화가 융성한 많은 나라들의 경우, 고대 및 중세의 역사연구에서 불교 측 기록을 찾아보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한국은 조선시대에 이런 기록들이 말살되었다.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이지만 근 오백여년 간 그 명맥이 끊겼기 때문에 불교가 고대사 연구에 제공하는 긍정적인 side-effect를 누리지 못한다.


무학대사에 대한 나의 기억은, 조선의 한양 천도에 관한 야사에서 제일 많이 발굴된다. 계룡산(지금의 계룡시 인근) 부근을 먼저 추천했고, 한양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향후 경복궁에 대한 상세설계를 논의할 당시 경복궁이 동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임진왜란과 계유정난에 대한 예언은 덤이다.) 물론 저 야사는 임란 당시 혹은 그 이후 나온 말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왕권이 강하지만 장자승계가 제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던 터라 겸사겸사 말 엮기 좋은 것들로 그럴듯하게 버무렸을 것이다. 다만 이런 야사들을 통해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야사에서 무학은 불교계를 상징한다. 정도전은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지배세력, 즉 고려를 무너뜨리고 불교를 억압한 조선의 지배계층을 상징한다. 나아가, 유교 혹은 유가문화와 연결지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저 야사는 무학의 의견을 따랐어야 한다는 어투이고, 임란으로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에 대한 잘못을 추궁하는 내용이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불교를 억압한 지 이백 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불교 문화는 적어도 백성들의 정신과 마음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추가로, 해당 야사는 임진왜란 초기의 참혹함과, 정유재란 직후 피폐해진 각 지역 백성들의 삶을 이유로 흘러나온 이야기일 수 있다. 국가는 전쟁을 막고 외교와 방비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연산군 대에 발생한 두 번의 사화에서 시작하여 조정에는 연신 피바람이 불었다. 중종 이후 선조대까지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백성들 입장에선 지배층끼리 물고 뜯는 싸움이다. 중앙이 허술해지면 지방의 법치도 허술해진다. 이는 백성 수탈의 시작이 된다. 어렵지 않게 중앙정부가 제대로 일 안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쉽다. 이런 모든 사회 분위기가 종합되어 이런 논조의 야사가 생성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선건국 후 이백여 년이 지난 후이므로, 일반 백성들의 삶에서 예전처럼 불교적인 색채가 많이 묻어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유가 기반의 삶의 방식은 선비 혹은 양반층에 국한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도가나 무속신앙에 근거한 세속문화에 불교의 색채가 끼얹여진 상태로 천 년간 살다가, 불교색채가 다시 빠진 모양으로 다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에 대한 미움이 불교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그림은, 한편으로 조선 초기 숭유억불을 제창한 사상가들 말고 실질적으로 정책을 만든 정책가들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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