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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우 Oct 03. 2019

사랑이라는 이름의 절망

에드바트르 뭉크. The Kiss



폭풍이 친다. 바람이 매섭게 요동치고 빗방울은 사정없이 창문을 때린다. 연약한 촛불은 제 마지막을 태워가며 실내를 희미하게 밝힌다. 여기, 세상에 곧 종말이 닥칠 것처럼 미친듯이 서로를 갈구하는 연인이 있다. 명멸해가는 빛 속에서 오직 어둠만이 그들을 잠식해간다. 




Edvard Munch, The Kiss, 1897



성인이 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타인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깨닫는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구속하지 않으며, 타인이란 언제든 곁에 머물다 떠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어떤 이유로든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는 것을. 사랑이란 것은 존중과 배려에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온전함을 말이다. 그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랑임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한 예술가가 그려낸 사랑은 이와 조금 다른 결을 지녔다. 그는 유년기에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 사랑의 실패로 평생 극심한 정신병적 증세를 겪은 에드바트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다. 대상의 외형을 묘사하기보다, 그는 자신의 불안을 연료로 삼아 캔버스에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택했다. 내면에 부유하는 뭉크의 불안은 왜곡되고 비틀린 형태와 음울한 색채로 표출되었다. 

 


Edvard Munch, Kiss by the Window, 1892



거듭된 사랑의 실패는 뭉크를 어둠속으로 한걸음 더 잠식시켰다. 실제로 그는 여성에 대한 혐오, 피해망상을 가졌다고 알려진다. 그럼에도 그는 두 남녀가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한동안 매료되기도 했다. 바로 키스(The Kiss) 연작이다.


연인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으로 존재하는듯 열렬히 상대를 탐닉한다. 개별적인 두 명의 인간이 아닌 사랑과 질투와 욕망이 한데 뒤섞인 하나의 덩어리로. 상대의 밑바닥까지 침투해 모든것을 다 갖겠다는 마음으로.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받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혼재되었던 뭉크는 그렇게 자신만이 느끼는 사랑의 형상을 그려냈다. 



Edvard Much, The Kiss, 1902



누군가 사랑이란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라 말했다. 타인에게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 나로인해 너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물리적 상처를 배제하고 바라본 폭력과 별반 다를게 없다. 뭉크가 표현한 사랑의 모습은 여기에 더 가깝다. 이는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이 진정 원하고 갈구했던, 도덕적 판단을 걷어낸 사랑의 모습과 더 근접해있다. 그것이 비록 괴물같은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라도.



뭉크는 절망과 우울의 화가라 불린다. 절망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절망이 아니었을까. 뭉크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느낀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이해해줄 누군가를 찾고자 했던 깊은 사랑의 열망을, 그러나 끝내 이루지못했던 한 인간의 애처로운 절망을 본다. 



Edvard Munch, Self-Portrait, 1895



글 | 유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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