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지우 Jan 12. 2020

때론 아름답고, 가끔 기묘하고, 종종 더러운.

화가 문성식이 그리는 노인과 풍경



노인의 얼굴을 가까이 바라본지가 언제였더라? 친가와 외할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신 후 우리집은 외할아버지와의 관계도 서먹해졌다. 오래전 학교에서는 노인을 일컬어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가르쳤다. 삶의 지혜가 켜켜이 쌓여있는 그들을 자라나는 청소년로서 공경하자는 의미였으리라. 빠르게 성인이 되버린 나는 이러한 가르침이 무색하게 그들과의 작은 접점조차 없었고, 출퇴근때 황금같은 내 자리를 빼앗아가는 불편한 존재란 생각만 커져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도서관들은 호시탐탐 새치기를 했으며, 조금이라도 빨리 걷지 않는 사람을 밀치곤 했다. 나는 그렇게 '걸어다니는 도서관'들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노인을 '혐오감을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존재'라고 표현한 어느 독일 작가의 글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노인은 티비에서도, 현실에서도 줄곧 외면받는다. 그들은 같은 시공간에서도 마치 없는 존재와 같은, 무색무취의 회색인간으로 떠다니는 셈이다. 여기서 병들고 가난하기까지 한 노인은 회색인간에서 나아가 투명인간쯤 되는걸까.   


그렇게 아무도 노인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마저 가까이 보려하지 않는다. 더 젊고, 더 예쁘고 더 힙한 것에 열광하는 절대다수의 우리들은 그렇게 노인을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치부해왔다.

 


바람이 알싸하게 추운 어느 겨울날, 삼청동에서 화가 문성식의 그림을 보았다. 그의 그림에는 모두가 외면해버린 노인의 얼굴이 화면 가득 떠올라있었다. 누군가 분명히 보았으나 외면해버린 사소한 풍경 속 노인의 얼굴을. 그의 캔버스에서 노인들은 삶의 주체로 다양한 행위를 한다. 꽃이 만발한 오후, 그들은 고개를 내밀어 중요한 일과를 수행하듯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거나, 무표정하게 닭의 목을 따거나, 정원 한가운데 서서 꽃냄새를 맡고 있었다. 


문성식의 그림 속 청춘은 주로 싸우거나 지질하게 울면서 이별을 한다. 파릇한 나이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고, 예민한 만큼 신경질적이다. 반면 노인들은 이별하는 청춘을 지긋이 바라보거나, 작디작은 방 안에서 무력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살아온 시간만큼 고요했다. 이토록 묵묵한 화가의 눈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보지못했던 노인의 얼굴과 삶을 새로이 발견한다. 




집요하게 그려낸 노인의 미세한 살결과 주름 하나하나는, 시간에 대한 애틋함과 한 세월을 온전히 통과한 누군가에 대한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문성식은 ‘그리는 행위’에 충실한 몇 안되는 화가이자, 그가 재료와 화면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수행자의 자세와 같다. 나비의 무늬 하나까지 제 손의 노동으로 거짓없이 표현해내는 그를 작가가 아닌 화가라 부르고 싶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문성식의 눈으로 나는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한국의 풍경을 본다. 과장하거나 편집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오랫동안 외면해왔지만 결국 먼 훗날 나와 당신의 얼굴이 될 누군가의 표정을. 때론 아름답고, 때론 기묘하며, 더럽기도 한 우리의 인생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보여줄 수 있는 상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