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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마음 Nov 19. 2021

사람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제대로 보면 보인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 그의 삶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그의 가족들의 평가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아래 인용문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참고로, 베른하르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라고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 - 필자 주)에게는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그런 바보천치를, 괴상한 소리만 들으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해지는 외국인들이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집안의 천치 한 명에게 전 세계가 홀라당 속아 넘어갔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어느 날 난데없이 영국에서 유명해지더니 위대한 사상가로 돌변해 버리는군, 하고 웃기는 현상으로 치부해 버렸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그의 가족들의 이런 평가가 매우 부당한 것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적어도 그가 남긴 업적과 여러 위인들이 그에 대해 남긴 평가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학문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그 유명한 버트런드 러셀도 그를 아래와 같이 평했다.


내가 아는 천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완전히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예

버트런드 러셀


러셀만 비트겐슈타인을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거의 찬양과도 같은 평가들이 줄지어 있다.


흔히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비트겐슈타인 이전까지'라는 단서를 덧붙여야 한다.

와스피 히잡


그의 관점과 태도는 과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예술가에 훨씬 더 가까웠다. 거의 종교적인 예언자나 선각자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는 마치 신적인 영감을 통해 통찰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떤 온당하고 합리적인 논평이나 분석도 신성 모독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루돌프 카르납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까지 극과 극으로 나뉠 수 있을까? 베른하르트는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했으므로 자기 가문의 철학자를 무시할 뿐 눈곱만한 존경심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꼭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만 이런 부당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도 꽤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출생 시점이 인류 역사의 기점이 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예수조차 이런 식의 평가절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1-6


나사렛 사람들이 그들과 동향인 예수를 배척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내가 추측하기로는 가까운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강점을 접하기 이전에 약점을 자주 접하기 쉬운데 그것이 그 사람의 강점을 보는 데 있어 가리개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자꾸 늦잠을 자고, 약속을 자꾸 어기고,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여러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학 실력은 월등히 뛰어날 수도 있다. 만약 그의 불성실함에 대한 편견을 그의 수학적 능력에까지 적용해서 그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평가다. 그러나 우리는 가깝고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부당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편견과 과소평가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시 하나가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제대로 보면 보인다


가까이에 있는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 보고 평가하지 말고,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봐야 한다. 보는 것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보듯이 낯설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원래 있던 편견의 벽을 깨고 그 사람의 진가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절하하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부당한 평가를 함부로 내린 것을 반성하고 처음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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