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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 Sep 18. 2024

[프롤로그] 어쩌다 책이란 걸 좋아하게 돼서는




책 만드는 일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모두 좋았던 탓에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건 책을 만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인데 그 다른일을 벌이고 만 것이다. 이게 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클 때 사람은 용감해지고 부지런해지고 참을성이 많아진다는 걸,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눈이 멀기도 한다는 걸 이 마음을 품게 되면서 알아간다.  홍지애, <책 만들다 우는 밤>


저는 좋아하는 책과 ‘아주 좋아하는 책’, 그리고 ‘아주 아주 좋아하는 책’은 있지만, 그저 그런 책이나 싫은 책이 없어요. 어떻게 운이 좋아 지금껏 괜찮은 책‘만’을 읽어온 대단한 행운의 주인공 혹은 매의 눈을 가지고 내가 딱 좋아할 만한 책만을 선별해내는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요. 그저 좋아하지 않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편집자가 되면 하루 종일 책만 읽어. 그게 일이야" 라는 선배의 말에  덥석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실이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은 진실이었습니다. 책을 만들기 위해 이미 나온 책을 검토하고, 책이 되기 위한 글을 앞에 두고 궁리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질릴 법도 한데 어디까지 좋아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듯 점점 더 좋아지기만 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오롯이 경험하게 되었고, 그저 좋아하는 것 이상의 애틋한 마음마저 품게 되었습니다.


편집자에게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책의 모든 것이 콘텐츠입니다. 만들고 있는 책만의 특징과 온도를 고려하여 책의 크기와 폰트, 글자의 크기, 종이의 느낌 등을 결정하고, 올컬러 책이 아니라면 어울리는 별색도 고민합니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는 면지는 색지로 갈지, 패턴을 넣어볼지 같은 아주 사소한 일도 편집자에겐 전혀 사소하지 않아서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죠. 인쇄를 보내는 그날까지도 나의 선택 중 ‘최선이 아닌 것’은 없는지 되돌아봅니다. 마치 정말 뭐 하나라도 더해주고 싶은, 이왕이면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되어 책을 만듭니다.


사실 이런 ‘만드는 이’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책이 나온 후 여간해서는 편집자가 주목받는 일이 없고, 사실 주목 받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죠. 하지만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해와서 인지 그 마음에 자꾸 주목하게 됩니다. 편집자들의 애쓰는 마음이 모여 ‘최선의 결과물’로 나왔을 책들에 저는 도무지 ‘별로’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책에 관해서라면 객관성이라는 건 애초에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무조건 좋아!’ 하는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모든 책이 ‘아주 아주 좋아하는 책’이 되는 건 아니지만요.)


책을 사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판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찾아봅니다. 편집자는 물론 디자이너, 마케터, 제작과 홍보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까지 살뜰하게 살피는 편입니다. 소리 내어 말하진 않지만 마음으로는 꽤 씩씩하고 우렁차게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응원을 보내곤 합니다.


판권을 부지런히 확인한 탓에 이름이 특이한 편집자나 ‘아주 아주 좋아하는 책’ 편집자의 이름을 아예 외워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도 아니면서 ‘아, 이 편집자님은 이런 책을 주로 만드시는구나’ 하게 되기도 하고, ‘어머, 이직하셨나보내? 전에는 이 출판사가 아니라 다른 출판사 책에서 이름을 봤었는데?’ 하게 되기도 해요. ‘어쩌다 이런 것까지 눈치채버린 거지’ 하고 혼자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새 책을 집어 들고 판권이 있는 책의 뒷면부터 확인하는 일만큼은 여전합니다.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나면, 더더욱 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싫어하고 좋아하고는 개인의 몫이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책이 되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나온 책도 아니겠지만 만든 이들의 수고와 기대를 저버리기가 쉽지 않아져요.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고 싶어집니다. 하다못해, ‘바코드 디자인이 되게 감각적으로 되어 있다’랄지, 책날개를 길게 빼니 세련돼 보인다’랄지, ‘가름끈 색이 예쁘다’ 등등의 아주 사소한 칭찬이라도 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책이라는 물건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좋은 것이 먼저 보여요.


이런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고 붙일 수 있을까요. 저는 뻔하지만 '사랑'이라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아요.  전 책이 참 좋아요. 책이라는 물건이 좋고, 책을 고르는 시간도 좋고, 책을 읽는 행위도 좋고, 책을 읽을 때의 몰입감도 좋고, 책을 읽는 내 모습도 좋고, 책을 좋아하는 나 자신도 맘에 듭니다. 도무지 싫은 게 없어요.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겠어요.


매년 연간 1인 독서량은 예외 없이 줄어들고, 1년간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성인이 50%도 넘는 나라에서 태어나 나는 어떻게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된 걸까요? 나는 어쩌다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편집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사양 산업인 출판 시장에서 내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요?


어쩌다 저는 책이란 걸 좋아하게 됐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책을 좋아합니다.


네, 맞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쓸 이야기는 책에 대한 일종의 사랑 고백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뿍 담아보려고 합니다. 이왕 이렇게 고백까지 한 마당에 조건 없이 찐하게 마음을 표현해보겠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댓가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사진: UnsplashBlaz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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