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부터 인스타그램에 책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책을 매개로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북스타그램’이라고 부르고, 운영하시는 분들을 북스타그래머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취미를 ‘독서’라고 써온 나름 ‘독서 외길 인생’인데, 그곳은 진정 신세계더군요. 대한민국 평균 독서율이 매해 바닥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이와 동시에 출판계는 매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갱신하고 있는데 북스타그램의 세계는 놀라웠습니다.
한 달에 2~3권 읽는 사람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10권 이상도 흔하고, 심지어 매일 한 권씩 읽는 분들도 있으시더군요. 독서량도 독서량이지만 더 놀라웠던 건 오로지 책으로 공감하고, 책으로 소통하는 세상이라는 점이었어요. 저는 그곳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어요. 주변에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없어서 좀 외로웠는데 그곳에서라면 얼마든지 유난스럽게 책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완전 신이 났죠. 이 계정, 저 계정 구경 다녔습니다. 그러다 이런 댓글을 보았어요.
‘책 읽는 분들은 다 착하신 거 같아요. 항상 따듯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응? 이게 뭐지 싶었어요.
‘책 읽는 사람들이 착하다니, 그럼 책 읽으면 착해진다는 이야기야?’
이 무슨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 싶었지만 슬금슬금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책 읽는 사람이 착하다면, 그 착한 사람에 나도 빠지진 않을 테니까요. 다정한 댓글에 대한 인사치레 말 정도로 생각했는데, 한 번 신경을 쓰고 난 후여서 일까요? 비슷한 종류의 댓글이 자주 보였어요.
책 읽는 분들은 다들 마음이 넓으시다.
책 읽는 분들은 배려심이 많으시다.
책 읽는 분들은 선하시다 등등.
볼 때마다 ‘에이~ 말도 안 돼!’ 했어요. 그런데 자꾸 보다보니 어떤 날엔 ‘그런가’ 싶기도 했죠.
그랬었는데
두둥!
어느 날 저는 알아버렸습니다.
‘책 읽으면 착해진다.’
이 명제는 ‘참’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과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약속 장소가 멀기도 해서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습니다. 아이들을 재촉해서 평소보다 일찍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고, 아침 설거지도 나 몰라라 하고, 전쟁이 났던 건 아닐까 오해하기 딱 좋은 상태의 거실과 아이들 방도 모르는 채 한 채 약속 장소로 출발했어요. 서두른 덕분인지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 딱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인이 도착할 때까지 잠깐 책이나 읽을까, 하고 가방 안에 있던 책을 꺼냈습니다. 시작부터 재미있어서 ‘이 책 꺼내온 나 자신 칭찬해’ 하는 마음으로 한참을 읽었어요. 읽다가 ‘시간 다 되지 않았나 싶어’ 시계를 봤는데 약속 시간이 15분이나 지나 있었어요. 그제야 왜 안 오지 싶어 문자를 보내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연락이 와 있더라고요.
‘미안해. 약속 시간을 착각했어. 11시인 줄 알았는데 10시였네. 최대한 빨리 갈게.’
10시 5분에 수신된 문자메시지였어요.
갑작스럽게 1시간이나 늦는다니, 이런 상황이면 한숨도 푹 쉬고, 화도 좀 나야 하는 거잖아요. ‘진작 늦는다고 이야기했으면 집안일도 좀 해놓을 수 있었고, 아이들을 아침부터 채근하지도 않았을 텐데 약속시간이 지나서야 늦는다고 문자를 보내다니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 하면서 짜증도 좀 내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안 나는 거예요.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잘 됐네. 오히려 좋아!’
들고 나온 책이 마침 너무 재미있어서 끊고 싶지 않았는데 이어서 읽을 수 있으니 좋고, 지금 아님 오늘 여유 있게 책 읽을 시간이 없었는데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어서 좋았어요. 진심으로.
‘걱정 말고 천천히 와. 책 읽고 있을게. 덕분에 혼자 책 읽을 시간 생겼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즐거워하는, 내 모습과 꼭 닮은 이모지를 찾아 메시지와 함께 보냈습니다.
잠시 후 이렇게 답장이 왔어요.
‘역시 여전히 착해!’
그때 머릿속에 불이 반짝!
‘맞네, 책 읽는 사람들 착하네!’
생각해보니 저는 오래전부터 약속 시간에 크게 민감하지 않았어요. 근데 제가 착해서라기 보단 전 진짜 괜찮거든요.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으니까요.
곰곰 생각해보니 책 읽는 사람들은 ‘이해와 허용의 정도’ 가 읽지 않는 사람보다 넓겠구나 싶었습니다. 비단 약속시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읽는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보다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는 사람들이 ‘착하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것 또한 그 이유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경험해본 일에 대해서는 조금 더 수월하게 이해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아는 사람에겐 아무래도 이해와 허용의 기준이 조금 더 관대하고, 남다른 배려를 하게 되잖아요. 오죽하면 ‘반상회’ 같은 것을 통해 이웃끼리 알고 지내는 것이 요즘 문제되는 층간소음 분쟁을 줄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제기되겠어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는 경험해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인간 유형을 알고 지낼 수도 없겠죠. 하지만 그 범위를 넓혀볼 순 있어요. 바로 책을 통해서죠. 책의 효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간접 경험’이잖아요. 책을 통해 실제로 할 수 없는 갖가지 경험을 하고, 실제로는 만날 수 없는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보며 타인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넓혀갈 수 있어요.
학생은 선생님의 마음을, 여자는 남자의 마음은, 노인은 젊은이의 마음을,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또 각각 그 반대의 마음을 책을 통해 알게 됩니다. 내 마음만 살피는 것이 아닌,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가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많습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각을 세우게 되지만, 알고 나면 이해하게 되잖아요. 이해가 전제된다면 배려도 보다 쉬워지지요.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남에게 상처에 되는 말을 경솔하게 쏟아내지 않을 수 있고, 어쩌다 토해내듯 한 말에 대해서도 늦지 않게 사과할 가능성이 책 읽는 사람은 좀 더 높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간접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니까요.
‘착하다’는 말이 요즘은 칭찬만도 아니지요. 그다지 좋게 사용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저는 ‘책 읽는 사람들은 다 착한 거 같아요’ 라는 이 말이 고맙습니다. 왠지 책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긴 하지만, 뭐 어떤가요? 셀프 칭찬이어도 듣기 좋아요.
사실 어떻게 책 읽는 사람이 다 착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책 읽는 사람은 알아요. 책 읽는 사람 중에 꽤 괜찮은 사람이 많다는 걸. 높은 확률로 선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지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눈길이 가요. 잘 몰랐던 사람이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호감이 생기는 거,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책 읽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변명하기 전에 방법을 궁리합니다. 안주하는 대신 나아가려고 애쓰죠. 포기하기보단 다른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내 고집을 피우기 전에 타인이 왜 그런지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떻게? 책을 통해서요! 알고 싶은 게 생기면 포털 사이트 검색보다 관련 책을 먼저 찾는 사람들, 이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바로 ‘착하디착한 책 읽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당신도, 착한 사람이겠군요.
여기까지 다 읽었다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리 없으니까.
반가워요, 착한 사람 씨.
우리 오래오래 책 읽으며, 오래오래 착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