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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 Sep 29. 2024

여행가서 책만 읽을 건 아니고요

여행을 앞두고 가방을 챙기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을 고르는 일입니다. 여행 앞에서는 한결같은 마음이 되어 성실하게 책을 가방에 꿰어 넣곤 합니다. 한 권만 야무지게 잘 읽고 와도 되거늘 책 앞에서 절제와 양보는 별로 없어요. 가는 동안 차에서 읽을 책, 숙소에서 읽을 책, 카페에서 읽을 책, 어떤 책을 고를지 도무지 정할 수 없을 땐 읽고 싶은 책을 전부 골라 챙겨 넣기도 하지요.  


아이들의 모습도 저와 다르지 않죠. “엄마, 우리 몇 밤 자고 오는 거지?” 하고 물으면서 시작되는 아이들의 ‘책’ 가방 싸기. 신이 나서 ‘이건 자기 전에 읽고, 이건 공원에서 읽고...’ 혼잣말을 해가며 신중하게 책을 고릅니다.


이렇게 아이들 책까지 더해져 한층 무거워진 가방을 이영차, 메고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가서 책만 읽을 거야? 그걸 다 챙겨?”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고백하자면, 챙겨간 책을 다 읽고 돌아온 여행보단 그렇지 못한 여행이 훨씬 많아요. 두어 페이지 읽다 손에 잡히는 종이 한 장 책갈피 삼아 아무렇게나 페이지 사이에 끼워넣고 닫아야 할 때도 많아요. 책을 펴지도 못한 채 그대로 가지고 돌아온 여행, 괜스레 귀퉁이만 접힌 채 돌아올 때도 있죠. 정말 드물게, 아주 낮은 확률로 가져간 책을 다 읽고 오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여행가서 내내 책만 읽을 수도 없고, 책만 읽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언젠가 그런 여행 해보고 싶긴 합니다만). 그저 여행의 순간에 책이 있다면 좋겠다고, 여행의 한 장면 정도는 책으로 기억되면 참 좋겠다고 소망하는 달뜬 마음을 품었을 뿐입니다.


가져간 책 중 일부만 읽으면 어떤가요. 꺼내보지 못한 책이 있음 어떤가요. 또 어떤 내용인지 기억 못하면 어떤가요. 솔직히 여행 중 책을 집중해서 읽을 만큼 고요한 시간은 생각만큼 많지 않잖아요. 이래도 저래도 모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조각의 시간일지언정 여행의 풍경에 책으로 한 장면 더한다면 충분하죠. 그때부터 그 책은 ‘그냥 책’이 아니라 ‘여행가서 읽다만 책’ ‘여행가서 읽으려고 했는데 못 읽은 책’이 되는 거니까요. 작고 소소한 기억도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추억이 됩니다.


여행의 피로를 따듯한 물로 씻어내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구를 마구 헤집고 들어가 머리와 팔만 쏙 내밀고 읽었던 기억이 있는 책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책을 통해 사각거리는 침구의 감촉이 생각나요.


일정과 일정 사이 잠깐 짬을 내어 들어갔던 카페에서 읽었던 책을 보면 그날 마신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커피 한 잔이 떠오르고요.


‘아, 이 책 강릉 갔을 때 가방에 내내 넣고 다니다가 결국 못 읽고 들고 왔었는데.’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고르다가 느닷없이 여행의 추억에 잠기기도 합니다.


“엄마, 제주도 갔을 때 엄청 큰 나무가 있었던 카페에서 읽었던 책 어디 있어? 수박주스 먹으며 읽었던 그 책 말이야.” 여행 덕분에 책을 더 선명하게 더 특별하게 기억하는 아이를 보며 더없이 흐뭇해집니다.

운이 좋다면 여행 중 책 사이에 끼워둔 나뭇잎 한 장의 낭만을 뒤늦게 선물처럼 발견할 수도 있죠. 이렇게 여행의 일부를 책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대단히 충분합니다.



<사랑의 꿈>을 쓴 손보미 작가가 ‘작가의 편지’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럴 때가 있잖아요. 소설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걸 읽었던 순간은 이상하게 잊히지 않을 때가.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데, 문득 어느 날 기억해내고 마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순간들이 주는 힘을 알고 있어요. 그런 순간에 느껴지는 마음의 작은 울림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쭉, 기꺼이 무거운 책을 가방에 채워 넣고 여행을 다닐 생각입니다.


그럴 용의가 있습니다. 다분합니다. 누가 뭐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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