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전 일반 기업에 몇 년간 근무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가장 좋아하던 복지는 바로바로 도서지원금! 회사에서 매달 온라인 서점에 적립금을 넣어주어 일정금액만큼 부담 없이 보고 싶은 책을 사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보던 책은 소설과 에세이. 20대 사회초년생 시절, 한창 일본소설과 여행에세이에 빠져 있었던지라, 눈에 띄는 신간 위주로 차곡차곡 장바구니에 넣어뒀다가 급여일에 결제하는 게 제 낙이었죠. 그렇게 산 책들을 업무 중간 잠깐 짬이나거나 점심시간 틈틈이 읽곤 했는데 어느 날 같은 부서 선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어요.
“이제 책다운 책 좀 읽어야 하지 않겠어?”
저는 진심으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책다운 책이 무엇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자기계발비로 도서지원금 주는 거잖아. 자기를 계발할 수 있는 책을 읽어야지. 어쩜 항상 소설 아니면 에세이니.”
생각지도 못했던 선배의 말에 저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당황했어요. 당황은 했지만 선배의 말에 절대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음이 파르르 발끈했습니다. ‘그건 아니죠’ 싶었지만 당장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네!”라고 대답하고 읽고 있던 소설책을 가방에 급히 넣었던 기억이 나요.
도무지 선배의 말 무엇 하나에도 동의가 안 되었어요. ‘소설과 에세이’가 책다운 책이 아니라는 말도, 자기계발할 수 있는 책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에도 완벽하게 입장을 같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얼굴만 빨개지고 아무 말 못했던 게 아직도 억울합니다. 아직도 억울해서 그 회사를 더 이상 다니지도, 그 선배와 연락을 하고 지내지도 않지만 이제라도 발끈해보려고 하는데, 그럼 저 너무 속좁은가요? 그래도 한 번 해보면 안 될까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선배, 선배가 제 걱정해주시는 건 참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소설이랑 에세이로도 충분히 자기계발하고 있는 걸요? 자기계발서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하고 핵심만 찔러서 알려주는 1타 강사의 족집게 핵심 강의라면 소설은 친구의 경험 어린 조언이랄까요? 족집게 강의는 들을 땐 다 알 것 같고, 이대로만 하면 100점 맞겠다 싶지만 집에 와서 혼자 풀다보면 안 풀릴 때도 많잖아요. 친구의 경험 어린 조언은 내 눈높이에 딱 맞게 설명해주고 다양한 예시와 친구의 시행착오를 곁들여 설명해줘서 시간은 조금 더 오래 걸려도 마음에 남아요. 소설이 자기계발서처럼 ‘이렇게 살아라’하고 콕 집어 알려주진 않지만, 그 안에 인생의 지표로 삼고 싶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요. 반대로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겠다는 삶의 교훈을 얻기도 하고요. 회사생활에 있어 업무 실력도 중요하지만 관계를 유능하게 꾸려가는 것도 대단히 필요한 일이잖아요.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다양한 사람과 함께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저는 소설과 에세이 통해 내 삶을 예습하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책 속 서사를 통한 간접 경험이 저를 성장시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자기계발 중인 거 맞죠? 선배도 이참에 소설이나 에세이를 한 번 읽어보시면 어때요?”
자, 어떤가요. 이 정도면 선배가 다시는 ‘책다운 책’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겠죠? 제 논리에 설득이 되진 않았더라도, 적어도 ‘아, 얘 참 말 많네. 앞으론 이런 말은 꺼내지 말아야겠다’ 정도의 결심은 서지 않을까요? 속 시원합니다.
어디 제가 만났던 선배뿐인가요. 소설이나 에세이는 그냥 재미로 읽는 책이고, 인문서나 경영경제서, 자기계발서 등을 읽어야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자기계발'을 위한 책과 '재미'를 위한 책이 따로 있을까요?
사실 저도 자기계발서 좋아합니다. 요즘은 자주 읽어요.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대로만 하면 정말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겠구나 싶어, 책을 읽음과 동시에 마음은 이미 반쯤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죠.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져다주는 게 어디 ‘자기계발서’로 분류된 책들뿐인가요? 자기계발서는 말 그대로, 나를 더 발전시키는 책, 내 안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책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세상의 모든 책이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계발서와 ‘안’ 자기계발서가 어디 따로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책은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 읽고 어떤 책은 나를 퇴보시키기 위해, 혹은 한 자리에 정체되어 있기 위해 읽지 않잖아요.
우린 소설을 통해 인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재밌습니다. 엄청 재미있죠. 하지만 재미가 끝은 아니에요. 로맨스 소설을 통해 내 모호했던 연애의 답을 찾기도 하고, 우정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고 나은 교우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가족 소설을 읽고 오랜 시간 화해하지 못했던 부모에게 먼저 손 내밀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회사 생활을 다룬 소설을 통해 내 사회생활을 돌아보고 주인공에게 닮고 싶은 점을 찾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큰 결심을 하게 되기도 해요. 이야기는 대단히 힘이 세서 내 마음을 송두리째 요동치게도, 단번에 멈추게도 하지요. 어쩌면 그 어떤 책보다 빠른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주는 게 소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세이는 어떤가요. 간혹 '남이 살아온 이야기 뭐하러 읽어'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의 경험은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에 대한 예습이라고 생각해요.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먼저 경험한 선배들의 삶을 글을 통해 따라가며 ‘만약 나였다면’ 하고 구체적으로 꿈꾸게 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기에 조금 더 실감나고 와닿지요.
책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몸을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시나브로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끝없이 자기계발을 시켜주는 셈이지요. 지금 이야기한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그림책도 동화책도 요리책도 역사책도 모든 분야의 모든 책들이 그러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알드 달의 동화 <마틸다>에서 다섯 살 소녀 마틸다는 이야기합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조지프 콘래드와 돛단배를 타고 항해를 떠날 수 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아프리카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러드야드 키플링과 인도를 탐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책이라고 말해요. 조그마한 소녀 마틸다는 그저 영국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자신의 작은 방에 앉아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을 뿐이지만 마틸다는 책을 통해 못할 게 없습니다.
어디 마틸다만의 이야기일까요? 저도, 우리도 그렇습니다. 책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고, 무엇이든 꿈꿀 수 있습니다. 책은 한계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