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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30. 2024

지붕 위의 바이올린

니스의 마르크 샤갈 박물관


"신이시여, 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날이 밝기 전 제 눈을 감게 할 것이고, 그리고 저는 하늘과 땅 위에 당신을 위한 그림을 다시 한번 그릴 것입니다."(마르크 샤갈)


       

1. Sunrise Sunset     


러시아 유대인들의 일상 속에 면면히 전해오는 러시아식 감수성.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방랑하는 분위기, 러시아 농촌에서 많이 보이는 자연적인 대상들, 이런 것들이 다소 추상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그려지면서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영화는 한 편의 뮤지컬을 보여준다.     


숄렘 알레이헴(Sholem Aleichem)의 소설 ‘테비에와 그의 딸들’(Tevye and His Daughters)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 1964)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샤갈의 ‘바이올린 연주자’(1912-13)라는 그림이 결정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바이올린 연주자(1912-13) 암스테르담 Stedelijk Museum

샤갈 역시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기에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정서가 러시아식 감성을 지니고 있을 터이다. 더구나 샤갈은 유년기에 고향마을에서 바이올린과 성악, 그리고 그림 그리기 등을 배운다, 그림 속 연주자는 샤갈의 경험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한 발을 지붕 위에 올리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 그리고 그림 속 교회가 있는 마을풍경 등은 모두 샤갈이 유년기를 보낸 고향마을일 것이다. 그래서 샤갈의 어릴 적 경험과 기억들은 한 편의 시처럼 그림으로 태어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큰 줄거리는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의 작은 유대인 마을에 사는 우유 배달부 테비에와 가족들 이야기이다. 특히 이 영화의 OST인 “Sunrise Sunset”은 단순한 영화주제가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노래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굳이 러시아라는 지역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삶이 그렇게 해가 뜨고 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가기 때문이겠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그는 유대계 출신으로 벨라루스의 비테프스크(Vitebsk)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바지는 청어를 파는 생선가게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채소를 파는 가게에서 일을 했다. 샤갈의 작품에서 보는 생선과 채소 등은 바로 그의 유년시절을 보여주는 추억의 징표들이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교회당 역시 그가 살던 곳에 있던 비테프스크의 교회당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 교회당은 2치 대전이 발발하자 폭격으로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없다.

    

나와 마을(1911), 뉴욕 현대미술관 

샤갈은 19살이 되자 1906년 당시 러시아 제국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간다. 이곳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2년간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예술아카데미에서 엘 리씨츠키(El Lissizky)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한테 교육을 받는다. 이 시기 샤갈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공간배치 법과 여백처리 하는 법, 그리고 물감을 칠하는 법 등을 배운다.


샤갈은 1910년까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종종 고향마을 비테프스크를 다녀온다. 이때 샤갈의 뮤즈 벨라 로젠펠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샤갈은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그가 그린 그림처럼 마음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샤갈은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왕립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샤갈은 파리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는다. 이 당시 샤갈은 어느 정도 자신의 고유한 그림양식을 정립하게 된다.     


샤갈이 파리에 온 지 3년이 지난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연다. 이때 샤갈은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그림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해 좋은 반응을 얻는다. 샤갈은 전시회가 끝난 후 1914년 동생 결혼식 때문에 고향 마을 비테프스크로 간다. 샤갈이 비데프스크에 머무는 동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이듬해 샤갈은 벨라와 결혼을 하고 첫 딸 이다를 낳고 고향마을에 정착한다. 이 당시 샤갈의 그림은 벨라와 함께 몽환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젊은 연인들로 채워진다.

     

1)생일(1915),  2)골고다(1912)  니스, 샤갈박물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전개되는데 샤갈은 이때 지역인민위원회 미술지도위원으로 선출되고 새로 설립한 지역미술학교 교장을 맡기도 한다. 당시 그는 이미 저명한 예술가 반열에 올라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 멤버로 활동을 한다. 이런 상황은 샤갈에게 혁명의 미적 무장으로서의 위엄과 특권을 즐기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1922년 샤갈은 번번이 이념 교육으로 갈등을 겪게 되자 결국 벨라와 함께 고향마을을 떠난다. 샤갈은 베를린을 거쳐 1923년 파리로 돌아간다. 이제 샤갈에게 아방가르드적 혁명 정신은 작품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프랑스에 귀화한다.

      

광대들(1922-1944) / 니스 샤갈박물관

샤갈이 본격적으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39년 샤갈은 카네기 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런데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나치는 샤갈에게 퇴폐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계속 감시를 한다. 샤갈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벨라와 함께 미국으로 간다. 


샤갈이 미국에 도착한 후 3년이 지난 1944년 9월 2일 그의 아내 벨라가 급성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음을 맞는다. 벨라가 죽자 샤갈은 우울증을 겪으면서도 벨라를 회고하는 그림 2점을 그린다. 미국에서 그린 벨라와 함께 있는 샤갈의 그림이 벨라의 마지막 모습이다.

      

벨라롸 함께...


샤갈은 벨라가 죽은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때 샤갈의 딸 이다가 샤갈의 말동무로 영국출신 버지니아 헤거드 맥닐(Virginia Haggard McNeil: 1915-2006)을 소개해 준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해 다섯 살 된 딸아이를 가진 유부녀였다.     


그 후 샤갈은 맥닐과의 사이에서 아들 데이비드를 얻는다. 그러나 샤갈의 애정행각은 서서히 막을 내려야 했다. 그녀와 7년을 함께 했지만 그녀가 원래 남편 맥닐과 정식으로 이혼을 하고 벨기에 출신 사진작가와 아들 데이비드를 데리고 떠나버린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샤갈은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1947년 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남프랑스의 푸르른 하늘과 밝고 빛나는 햇살, 샤갈은 남프랑스의 푸르른 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한다.      


샤갈이 정착한 지 2년이 지난 1952년 60세를 맞이한다. 이때 딸 이다가 유대인 출신으로 바바(Vava)라고 부르는 발렌티나 브로드스키(Valentina Brodsky)를 새로운 비서 겸 가정부로 고용한다. 같은 유대인 출신이고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바바는 샤갈에게 새로운 뮤즈로 다가온다. 벨라의 빈자리를 8년 만에 다시 채운 65세의 샤갈은 47세의 그녀와 결혼을 하고 활력을 되찾는다.     

 

1) 바바를 위해(1955), 2) 바바(1955)/ 니스 샤갈박물관


한편 1960년이 되자 당시 샤갈과 친분이 있는 프랑스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의 부탁으로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극장 천장화(1964)를 그린다. 파리의 대표적인 오페라극장 가르니에가 샤갈의 동화 같은 그림 덕분에 더욱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된다. 파리 오페라극장 가르니에 궁전 천정화는 ‘음악의 원천’(The source of music), 또는 ‘꿈의 꽃다발’이라 부르는데 모차르트, 바그너,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차이코프스키, 라벨, 베토벤, 베르디 등 유명 음악가 14명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파리 오페라극장 가르니에, 천정화(1964)


1966년 앙드레 말로는 또다시 샤갈에게 우정 어린 제안을 한다. 샤갈의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샤갈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을 세우게 된다. 니스 시가 토지를 제공하고 박물관 건립이 추진된다. 1973년 샤갈이 86살이 되는 생일날 니스 시는 “국립샤갈미술관”(Musée National Marc Chagall)을 개관한다. 이 미술관에는 샤갈이 기증한 17점의 작품을 비롯해 400점이 넘는 작품들을 보유하게 된다. 

     

출애굽기에서 1) 모세, 2) 아기모세의 구출, 3) 이브의 창조/ 니스 샤갈 박물관
출애굽기에서 1)요셉을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 2) 노아의방주에서 비둘기를 날리다 3)노아의 방주를 만들라고 하다 / 니스 샤걀 박물관
1)아버지 롯과 두딸이 자손을 얻기 위해 동침을... 2)유대교상징 7가닥 촛대와 모세형 아론 3)아브라함 아들의 할레  / 니스 샤갈 박물관
1)하나님의 약속 무지개 2)노아의 희생 3)세천사에게 경배를... / 니스 샤갈 박물관


생존화가로는 처음으로 박물관에 영구 작품이 걸리는 영예를 받은 샤갈은 197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나이 98세가 되는 1985년 세상을 떠난다. 샤갈은 죽기 전 20여 년을 거주한 니스 인근 셍 폴(Saint Paul)의 유대인 묘지에 묻힌다.          



2. 샤갈은 언제나 샤갈을 그린다     


샤갈은 1930년대부터 성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특히 노아의 방주를 비롯한 구약성서 이야기를 많이 그렸다. 샤갈은 구약성서를 그리면서 유대교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도 자유로이 표현을 한다. 유대교에서 금하는 것도 샤갈은 주관적으로 표현하면서 상상 속 대상으로 승화시킨다.    

  

출애굽기 3단 그림 1)예수_부활 2)예수_저항 3)예수_자유 / 니스 샤갈 박물관


특히 성경이야기 그림에서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샤갈의 그림에서 쉽게 만나는 존재들, 즉 염소, 사람, 닭, 등은 기본이고 무엇인지 모르는 상상 속 동물 같은 것들도 보인다. 심지어 거꾸로 사람을 그려 넣기도 한다. 이런 것들 때문에 혹자는 샤갈의 그림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샤갈은 또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자기 성찰을 많이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샤갈은 자화상을 통해 미술학교 시절 배웠던 가장 기본적인 그림 그리기에 대한 원칙과 방법을 재점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를 통해 샤갈만의 고유한 미술작업을 더욱 세련되고 성숙하게 완성해 나가려는 스스로의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샤갈의 7손가락 자화상(1913) 퐁피두센터


한편, 니스의 샤갈박물관을 지으면서 샤갈은 “이 박물관이 젊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러 와 자신들의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이 주는 느낌이 다름 아닌 샤갈의 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유대교 집안의 자식으로서 유랑생활을 해야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다 헤어져야 하는 비극도 겪으면서 지치지 않은 노력을 통해 자신의 꿈을 여전히 작품으로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고스란히 샤갈의 작품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이 문득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샤갈이 자신의 꿈을 성서이야기로 풀어나가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1940년대는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키자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다. 그런 이유로 샤갈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희생의 의미를 표현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야곱의 꿈이라는 작품은 절대자인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사다리를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1)야곱의 사다리, 2)아브라함과 3천사 / 니스 샤갈 박물관


또한 ‘이브라함과 세 천사’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부인 사라가 천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이때 천사들은 아이가 없는 아브라함 부부에게 곧 아이가 생길 것이라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부인이 낳을 아이 이삭은 하느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의 희생을 시험하기 위한 조건으로 태어나 죽게 되는 운명을 지녔다. 과연 하느님의 종이 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바치는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어려운 숙제를 느끼게 한다.     


한편, 샤갈 박물관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아가서’(song of songs)를 그린 그림 5점이 있다. 이 그림들은 하느님과 인간 간의 교감을, 사랑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남녀 간의 사랑과 자연과의 사랑, 그리고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랑 등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그림 속에 표현하고 있다.     


5점의 아가서 그림들은 모두 배경색을 아주 강렬한 빨간색으로 칠했고, 샤갈 특유의 상상 속 새나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은 인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한 동물과 이름 모를 상상의 존재들까지 다 함께 존재하기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가서’(song of songs) 1)1960, 2)1965-6, 3)1960 /니스 샤갈박물관
아가서’(song of songs) 1)1958,  2)1957 / 니스 샤갈박물관

또 다른 아가서 그림에는 페가수스 말을 타고 연인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데, 머리에 새가 앉아 있고 달리는 말은 어느 도시 위를 날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페르세우스가 죽인다. 그러나 메두사를 사랑한 표세이돈은 그녀가 죽을 때 그녀의 영혼을 간직하고 그녀의 흘린 피를 모아 날개 달린 말, 즉 페가수스로 태어나게 한다. 페가수스는 어쩌면 아테나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하늘을 날며 사랑을 나누고 싶은 포세이돈의 꿈이 담긴, 그래서 연인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그런 상징이 아닐까.

     

또한 두 남녀가 함께 자리한 작품은 연인들이 매우 낭만적으로 보인다.  마치 갓 결혼한 한쌍의 연인들처럼 머리에는 꽃도 꼽고 눈은 아스라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어쩌면 샤갈이 가고 싶은 고향을 그리려 했던 건지, 아님 샤갈의 뮤즈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 속에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다름 아닌 그림 속에 샤갈 자신을 살며시 그려 넣은 것이다. 오른쪽에 작게 그린 왕관을 쓴 이상한 모습의 사람이 바로 샤갈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이상한 존재로 비유되는 유대인은 바로 서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그려져 이상한 유대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설적인 반전을 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샤갈 그림은 반드시 그가 유대교 신자이기 때문에 유대교나 기독교적으로만 해석하기보다 이교도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종교적 감정을 기독교적 방식으로 표현해 내려했다고 보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 아가서(Song of Songs)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노래들 중의 노래', 즉 '최상의 노래'라고 한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들을 모아 놓았다.          


  

3. 샤갈의 그림들     


샤갈의 작품 속 주제들은 샤갈의 성장과정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속 대상들인 바이올린 연주자, 마을 풍경, 염소, 말, 닭, 새, 연인 등등 대부분의 소재들은 바로 그의 기억 속 대상과 거의 일치한다. 심지어 샤갈의 어머니와의 애틋한 추억까지도 샤갈은 잊지 않고 그렸고, 그가 사랑한 뮤즈 벨라와 바바 역시 샤갈 작품 속 애정 어린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에펠탑의 신랑신부(1938) 퐁피두센터


샤갈이 말년에 살았던 집 응접실에는 그의 그림 '에펠탑의 신랑 신부'(1938)가 걸려 있었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가기 직전 그린 작품이다. 남성 모델은 샤갈, 여성 모델은 그의 아내 벨라였다. 벨라가 죽은 후 샤갈은 바바의 초상화를 그린다. 어둠을 뚫고 바바의 아름다움이 생명력 가득한 화사한 꽃으로 채워진다. 샤갈의 그림은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샤갈은 출애굽기(Exodus: 1952-1966)를 통해 모세를 만난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주제였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주인공, 그래서 샤갈은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 즉 십계명을 전달받거나 민중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떠나면서 민중을 이끌기도 하고 하느님을 알리기 위해 기적을 행하기도 하는 등 천사 같은 사나이로 등장하는 모든 과정을 그린다. 

      

출애굽기 모세와 지팡이, 애굽탈출 /니스 샤갈박물관
출애굽기 모세 형 아론을 만나다, 모세 예수와 함께 / 니스 샤갈박물관


샤갈의 출애굽 기와 관련된 그림들은 유대교 신자로서 철저한 묘사력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찬양을 보인다. 샤갈의 그림 홍해를 건너다(La traversée de la mer Rouge: 1955)를 보면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모세의 옷에 이집트 노예로 억압받던 유대인 무리가 그려져 있다. 중간의 하얀 파도는 하느님이 행한 기적이고, 그들을 추격하는 파라오의 군대가 흰 파도에 밀려 전진을 못하고 물에 잠기는 장면까지 묘사되어 있다.

      

1)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2)천지창조 3)아담과 이브 에덴동산에서 추방 / 니스 샤갈박물관
1)이삭의 제현 2)므리바의 바위를 치는 모세 3)불타는 관목 곁에 있는 모세 / 니스 샤갈박물관
1)십계명을 받는 모세 2)노아의 방주 3)인류의 탄생 / 니스 샤갈박물관


떨기나무 앞의 모세(Moïse devant le buisson ardent: (1960-1966)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곁에서 고통으로 뒤 덮인 백성들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의 절대적인 신의 형상을 통해 유대교 신자로서 샤갈은 신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유대민족이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특권을 제공한다. 특권의 징표는 바로 모세 머리에 난 뿔이다.     


샤갈 자화상(1985) 니스 샤갈박물관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할 터이니 민족을 해방시켜라!"라고 하면서 그 징표로서 모세의 머리에 뿔을 달아준다. 이것으로 모세는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며 민족 해방에 성공한다. 그러니까 모세의 뿔은 신성을 의미하며, 신의 은총이 함께한다는 상징이었던 게다. 

    

어쩌면 모세의 상징 같은 머리의 빛나는 뿔은 은밀하게 샤갈에게도 전해졌다는 생각이다. 샤갈은 그가 그린 마지막 작품, “또 다른 빛을 향하여”(1985)에서 그림 속 화가의 등에 두 개의 날개를 달아준다. 천사의 날개를 단 화가는 샤갈 자신이다. 그는 캔버스 안의 두 사람으로부터 꽃다발을 건네받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아주고 있다. 샤갈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 신이시여, 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날이 밝기 전 제 눈을 감게 할 것이고, 그리고 저는 하늘과 땅 위에 당신을 위한 그림을 다시 한번 그릴 것입니다." 샤갈은 20여 년 전 자신이 쓴 시를 이 그림에 붙인다. 

     

샤갈은 이 작품을 그린 다음날 눈을 감는다. 샤갈은 그의 그림 속 천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니스 샤갈박물관 입구 벽에 그린 그림, 선지자 엘리아(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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