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게르벡스(Henri Gervex: 1852-1929)
1878년 작, 유화. 221.3cm x 176.2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화사한 햇볕이 가득한 방안, 눈부신 나신의 여인이 잠들어 있다.
그 곁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방안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듯한 드레스며 장신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지난밤 그녀와 보낸 시간들을 회상하는지 남자는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여인은 매춘부 마리,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는 사업가 쟈크 롤라(Rolla), 그림 제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 보면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불안에 감싸인 채, 싸늘하고 시니컬하게 보인다.
사실 롤라에게 지난밤은 인생의 마지막 밤이었다.
젊은 사업가 롤라는 사업에 실패하고 이 세상과 이별하기 전 매춘부 ‘마리’에게 남은 돈을 투자하고 자살을 생각하는 듯하다.
‘롤라’라는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의 동명의 시를 모티브로 그렸다.
“롤라는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지쳐서 잠들어버렸다./ 이렇게 두 사람은 모두 운명의 잔인함에서 벗어난다./ 소녀는 잠 속에서,/ 사내는 죽음 속에서.”(‘파리 여행’/ 알프레드 드 뮈세)
앙리 게르벡스는 이 작품을 26살이던 1878년 살롱에 출품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마네에게 했듯이 그의 작품을 비난하며 게르벡스를 받아주지 않는다.
서양미술에서 누드는 주요 소재이지만 당시의 아카데믹한 미술계 풍토는 신화와 성녀를 묘사할 때만 누드가 허용될 뿐이었다.
일반인을 적나라하게 그릴 경우 언제나 ‘외설’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가 일반 여성들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킴으로써 배척당했 듯, “롤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마리의 팔은 뒤로 젖혀져 있고, 두 다리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어지럽게 흐트러진 구두와 액세서리, 드레스는 밤의 정사가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 알려준다.
성녀가 아닌 매춘부 마리, 신화가 아닌 19세기말의 부도덕한 사회상의 단면, 그러니 당시 비평가들이 문제를 삼을 수밖에...
그림 속 ‘롤라’는 세기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와 더불어 새롭게 부각된 자본주의가 점차 성행하며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사회적 불평등이 날로 심화되어 가던 시기, 당시 유럽사회는 만연된 자살로 인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자살론’이라는 책까지 쓸 정도로 사회현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그런 세기말의 허상들이 그림 속 ‘롤라’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요즈음 한국사회의 단면들이 점차 부도덕한 단면들로 도배되다시피 드러나고 있다.
모두가 지난 세기의 일인 줄 알던 일들이 지금 대한민국 한복판, 그것도 정치권 한복판에서 통치자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탓하고 있는데도 마냥 하마 같은 풍채로 바람을 가르려 하고 있다.
“제발 그림이 주는 눈부신 화사함을 진정 즐길 수만 있다면...” 하는 듯이 말이다.
* 알프레드 드 뮈세
그는 파리 태생으로 20세에 시집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이야기>(1830)로 문단에 데뷔하고, 낭만파 시인으로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