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 아들이랑 귀찮아 엄마 2

3. 한라산의 조교

by 서로소

"엄마 빨리 걸어. 빨리"

군대는 안 가봤지만 군대 행군의 조교처럼 사방을 살피더니 손짓으로 얼른 오라고 독촉하는 아들내미가 저만치 보인다.

"아들, 엄마 다리 삐었다고!"

"엄마, 여기 멧돼지 출몰 지역이야. 여기 표지판 봐봐."

멧돼지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멧돼지 주의 표지판이 있긴 있다.

멧돼지보다 지금 나는 접질린 발목 때문에 다 내려가기도 전에 해가 지는 게 더 두렵다.

"엄마, 내가 업어줘?"

"크크. 말이라도 고맙네. 근데 너 나 못 업을 거 같은데. 얼른 가기나 해 인마."

키가 제법 커서 어느덧 어른만 해진 아들이 저렇게 말하니 든든하면서도 아직 늙지도 않은 엄마가 저 등에 업힐 수는 없지 하고 괜히 더 센 척한다.

사방이 돌 길이었다. 접질린 발목은 돌 길에서는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아팠다.

다행히 험한 길은 끝나가는지 데크길이 간간히 나왔다.

"엄마 평지 걸을 때는 발목이 괜찮아. 빨리 걸을 수 있어!"

"엄마, 이렇게 보폭을 크게 해 봐. 나처럼 이렇게 보폭을 크게 하면 빨리 걸을 수 있어."

"그래? 알았어."

아들 말대로 보폭을 크게 하니 주변 풍경이 빨리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산 길에는 하산이 늦어진 우리 둘 뿐이었다. 남편은 내가 다리 아프니 빨리 내려가서 차를 대기시켜 놓아 달라 부탁을 한지라 한참 전 먼저 내려갔다.

아빠가 내려가니 이 녀석이 나는 믿음직해 보이지 않았는지 갑자기 걸음을 서두르며 나를 재촉했다.

"엄마, 멧돼지 있대. 멧돼지 나오면 어떡해?"

"여기 멧돼지가 어딨어? 엄마가 스틱으로 콱 무찔러 줄게."

"엄마, 멧돼지 가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아? 칼도 잘 안 들어간다고. 스틱이 부러질 거야. 우리 공격당하면 큰일 나. 무조건 도망가야 돼. 근데 엄마 지금 다리 삐어서 못 뛰잖아. 나만 엄마 놔두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 빨리 내려가야 돼. 빨리 와 빨리."

하아.. 이제 엄마의 호언장담 따위는 통하지 않는 나이구나. 내 힘이 그다지 세지 않다는 것도 알고.

"엄마가 다 무찔러 줄 수 있어. 눈부터 공격하면 되잖아. 그리고 여기 진짜 무슨 멧돼지가 있다고 그래?"

주위를 스윽 본다. 바람결에 속밭이 흔들린다. 올라오는 길에도 노루가 속밭 사이사이에서 보였다. 저 속밭 사이 들짐승이 숨어있을 법하긴 하다. 게다가 내 삐끗한 발목 때문에 하산길이 두 배는 느려져 사람들 모두 내려가버린 산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가끔 바람이 불면 고요한 산에 바람 소리가 크게 들리니 아들은 뭐라도 나타날까 봐 무서운 게다. 게다가 해가 점차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알았어. 평지에서는 빨리 갈게."

데크에 걸리적거리는 스틱도 손에 쥔 채 나는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여 보행 폭을 넓혀 걸었다.

"근데 j야, 돌길에서는 이게 최선이야. 노력은 해볼게."

다리에 무리를 덜어주기 위해 양 손에 스틱을 쥐고 사족 보행을 해도 아픔을 견뎌가며 걷기란 쉽지 않았다.

엄마로서 약해 보이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걷는 중이었다.

"휴게소에서 쉬지 말고 가자. 그런데 화장실은 다녀와야겠어. 화장실만 다녀오자."

남편은 아들에게 엄마를 부탁하며 마지막 남은 물 한 병을 주었다. 산 한가운데 있는 우리 둘에게는 물 한 병과 휴대폰만 있을 뿐이었다. 아들에게 큰 소리는 쳤지만 나도 속으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을 괜히 먼저 가라고 했나 싶어 후회가 되었다. 얼마 안 남은 줄 알았는데 가도 가도 표지판의 미터수가 쉽사리 줄지를 않았다. 아들은 앞장서서 내려가다 돌아서서 기다리고, 또 내려가다 돌아보고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엉금엉금 거북이처럼 걷다시피 가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다. 아빠랑 벌써 내려가고도 남았을 녀석인데. 느려진 하산 속도에 아이도 힘이 빠져가는 것 같았다.


아들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빨리 오라고 성화를 해서 가보니 한 커플이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이 보이니 다소 안심이 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들이었지만 그래도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아들 말처럼 멧돼지라도 나타나면 저 젊은 남자가 애인을 지키려고 싸우는데 큰 힘이 되어줄 거라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적어도 아들과 나만 있는 것보다는 넷이 낫지 을까 싶었다.


한라산에 오기 전 아들 때문에 속상한 나는 더 이상 다투기 싫을 때마다 문을 나서서 집 앞 공원을 참 많이도 걸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일인 거 보니 소소한 일로 말하다가 속상했었나 보다. 그렇게 나와 걸은 거 같은데 살도 안 빠지고 체력은 또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이제 나이가 든 나를 인정해야겠다.

그런데 한라산에 둘이 남으니 아들은 다리가 아픈 나를 이끌고 빨리 오라고 독촉하면서도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런 너를 잠시라도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니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고 있었다. 물론 아이가 미운 게 아니라 그때의 행동이 밉고 실망스러운 거였지만 그런 마음을 가졌던 내가 부끄러울 만큼 저 아이는 나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함께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대견하고 참 기특하였다. 그래도 '내가 아이를 잘 키웠구나.' 싶었다.

어릴 때 내 등에 업혀 잠들던 어린 아기가 이제 다 커서 업어주겠다고 말도 하고 아이들은 참 빨리도 큰다.

내가 더 나이가 들고 거동도 불편해져도 이 아이에게 의지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아이가 힘들면 언제든지 와서 울고 격려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도와주는 그런 엄마이고 싶다.


우리 모자가 걱정돼서 산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뛰어올라온 남편을 만났다. 아이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 팔에 기대어 다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우리의 길고 긴 산행은 끝이 났다. 목은 삐어서 아팠지만 가족 모두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고마운 산행이었다. 무려 열세 시간의 산행을 함께 한 아이와 나 그리고 남편은 인증서를 보고 또 보았다. 우리가 함께 여기를 오르다니 꿈만 같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의미 있는 시간은 설탕물과 같다'라고 말했다. 한라산을 오른 그날이 내게 그렇게 느껴졌다. 어느덧 접질린 다리는 잊고 창 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가족의 버킷리스트를 완성한 감격에 잠시 잠겨보았다.

산을 오르면서 아들은 여기가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 맞지? 하고 연신 물으며 뿌듯해했다. 미터가 써져있는 바위마다 인증샷을 찍어가며 씩씩하게 산을 오르던 네 모습 잊지 않을게. 힘이 남는지 휴게소마다 먼저 도착해 핸드폰 게임을 하며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영락없는 사춘기 소년. 네가 다리 아프다고 징징대니까 나는 더 좋았다. 아직은 그런 모습으로 있어줘.

그래도 너 참 듬직했어. 그리고 따뜻하고 좋은 아들로 자라주어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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