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를 마치고 느긋하게 여유 부리고 있던 어느 날, 귀가 찢어질듯한 괴성이 바로 내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우리 집에 고라니 한 마리가 들어왔나 싶을 정도의 비명소리였다. 놀란 가슴 부여잡고 뒤를 돌아봤을 때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이사 그리고 남편의 이직으로 환경이 조금씩 변하며 살림살이는 전보다 나아지고 있었고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탄탄대로일 거라 믿었다.
이런 불경한 생각이 하늘에 닿았는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불행이 툭하고 떨어졌다.
코시국에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위기는 우리의 살림살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시기 남편의 회사는 쿠어츠아르바이트(Kurzarbeit)라는 단축 근무 시스템을 시행했는데, 쿠어츠아르바이트는 독일에서 어려운 시기에 일자리의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 단축 근무를 신청한 회사는 일정 금액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고, 근로자는 줄어든 근무시간만큼 급여를 적게 받는 제도다.
우리는 해고되지 않고 회사에 붙어있는 거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하며 3개월 동안 줄어든 급여로 빡빡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곧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걸 기대했지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힘겹게 연명하던 작은 불씨가 일거에 사라진 건 쿠어츠아르바이트가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남편의 절규를 듣기 전까지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거실에서 독일어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재택근무를 마친 남편이 호다닥 거리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혹여 내게 방해될까 봐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다 했고,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남편은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 준비를 하는 사이 남편이 반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와 내 손으로 200만 원 넘는 상품권을 구매한 건 처음이야! 내 것은 아니지만 카드 긁는 기분이 나쁘진 않군!”
"상품권? 어디에 쓰는 거야?"
"아까 회사 대표한테 연락 왔는데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아마존 기프트 카드 사 왔거든."
남편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본인 것도 아닌데 상품권을 흔들어 보이며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수업을 듣던 사이 남편은 회사 대표 이름으로 메일 한 통을 받았다고 한다. 급히 부탁할 일이 있으니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내용만 봐도 충분히 미심쩍은데 남편은 의심도 안 하고 전화번호를 넘겼다. 그리고 둘은 왓츠앱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콘퍼런스 중인데 협력사를 위한 아마존 상품권이 급하게 필요하거든. 그런데 지금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혹시 바로 구매해서 핀 번호 좀 보내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몇 장이면 돼?”
평소에 신중을 몸에 달고 다니는 남편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받지도 않는 남편이, 내게는 낯선 메일 주소는 절대! 함부로! 열지 말라던 남편이 그날따라 뭐에 홀린 듯 누가 봐도 이 구린 문자에 최선을 다해 답했다. 그리고 이날 제대로 돈줄 만난 대표의 탈을 쓴 사기꾼은 어린양에게 바로 본심을 드러냈다.
"아마존 상품권 250유로씩 10장이 필요해."
실제 대표가 그 시간에 콘퍼런스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사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남편은 히죽거리며 10장의 핀 번호를 넘겼다.
2,500유로의 핀 번호를 넝쿨 째 넘겨받은 사기꾼은 남편이 호갱임을 감지하고 과감하게 상품권을 더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융통 가능했던 현금은 바닥났고, 이제 돈이 없어서 더는 안 될 것 같다며 사기꾼에게 말했지만, 사기꾼은 한술 더 떠 신용 카드 사용을 요구했고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 역시 남편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신용 카드로 더 구매하면 되잖아. 급하다잖아.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다녀와”
부창부수라더니… 호구짓 할 땐 최상의 콤비다. 하지만 다행히(?) 한 번 나갔다 온 후 귀찮아진 남편은 사기꾼에게 ‘더 이상 구매할 수 없다’ 얘기하고 마무리 지으려 했고, 그쪽에서는 이제는 떼까지 쓰며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상함을 감지한 남편은 그제야 메일 주소를 다시 확인했는데 회사 메일주소가 아니었다. 그저 대표의 이름을 사칭한 알 수 없는 메일 주소였다.
그렇게 남편이 고라니를 삼키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의 절규는 일종의 쑈였다. 나한테 혼날까 봐 미리 선수 친 거라고 한다. 아주 깜찍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자기 방어에 성공한 남편 덕에 나는 내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생각하고 남편을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진정해."
사실 의연한 척 말은 그렇게 했어도 눈앞이 캄캄하고 손이 떨렸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우리에게만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연초부터 남편이 대상포진에 걸려 입원을 했고, 그 고통이 끝나니 단축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빠듯해진 살림에 보이스피싱까지 당해 우리의 삶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한 달 생활비가 몽땅 날아갔고,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 말을 삼키고 남편을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현금이 그것뿐이어서 다행이다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남편의 귀차니즘으로 카드 사용도 막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대책 없는 대책을 세우고 우리는 그 뒤에 경찰서에도 가봤지만, 코시국이라 경찰과 직접 대면하기도 어려웠고 기대하지 말라는 답변만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그 일이 남아있지 않을 때, 남편이 이직을 했다. 그 후에 이직 관련 정보를 링크드인에 업데이트했는데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대표 이름으로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나 콘퍼런스 중인데 지금 급하게 부탁할 일이 있거든. 너 전화번호 좀 알려줄래?”
여전히 사기꾼은 똑같은 수법으로 직장 정보가 업데이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다음 호갱을 물색 중이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러뜨리지만 많은 사람은 그 부러진 곳에서 더욱 강해진다'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그해우리를 부러뜨렸던 그 냉혹한 경험들은 그저 우리를 주저앉게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우리는 당시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기르게 됐다. 그리고 조금씩 우리의 삶도 단단해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