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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Dec 08. 2023

남편이 외모를 가꾸기 시작했다

내 머리 어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머리를 툭툭 털며 거울을 본다.


"나는 여성분들이나 남성분들이 왜 헤어 스타일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 예를 들면 <아 오늘은 머리가 잘됐네> 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몰랐어."


내가 거울로 시선을 돌리자 거울 속 남편의 눈과 마주쳤다.


"근데 이제 알겠더라고"


이제 막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춘기 소년마냥 구는 게 그저 우습다.


"왜? 오늘은 마음에 들어?"


"아니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더라고"


한쪽은 풍성하고 다른 한쪽은 달라붙은 머리 모양새가 오늘은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남편의 외적인 모습이 성에 안 차던 시절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꿔보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변화는 그때뿐, 남편의 외모는 탄성의 성질처럼 이내 본모습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노력할 땐 안 되더니 드디어 남편이 거울이란 걸 스스로 보기 시작했다.






한 달 전 남편은 10년 간 고수하던 헤어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했다.

한결같이 고집해 온 스타일에 변화를 준 이유는 이번 가을 한국을 방문하면 서다.

그동안 남편의 더벅머리가 신경 쓰였는지 아빠는 벼르고 벼르다 어느 날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머리 스타일을 바꿔보면 어떤가? 지금 머리도 잘 어울리긴 하는데 이제 나이도 들어가니 머리를 조금 길러서 가르마를 타 보는 건 어때?"


아빠는 좋은 의미로 제안한 거였겠지만, 깜빡이도 안 켜고 사적인 영역을 침범한 건 아닌가 싶어 나는 재빨리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남편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네 바꿔보겠습니다." 하며 손으로 머리 가르마 타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게 아닌가.


(어랏? 본인도 내심 바꾸고 싶었나?)


이 반응에 힘을 얻은 아빠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더니 본인이 30년 가까이 사용 중인 헤어 에센스 두 개를 남편 손에 쥐어줬다.


"이거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는 제품인데 아주 좋아. 딱딱한 제형이 아니라 인위적이지도 않고 머리도 자연스럽게 넘어가거든. 아마 독일에서도 구할 수 있을 거야."


아빠의 제품 찬양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앞머리를 기르면서 이 제품을 사용하면 가르마가 이쁘게 자리 잡힐 거야. 이게 끈적이지도 않아서 머리 감고 그냥 손으로 슥슥 쓸어 넘겨주기만 하면 되거든."


아빠는 양손으로 머리를 빗어 올리는 시늉을 냈다.

그러다 불현듯 우리의 결혼식이 떠오른 모양이다.


"맞다. 결혼식 때 머리는 어떻게 한 거야? 그 머리 이뻤는데."


고데기로 공들이며 무너지지 않게 단단히 말아 놓은 머리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지 말고 파마해 보는 거 어때? 그래 자네 파마한 번 해보게. 파마하고 이 제품 사용하면 머리가 예쁘게 자리 잡힐 거 같은데."


남편의 머리가 심히 거슬렸나. 아빠는 한술 더 떠 파마가 풀릴 것을 대비해 나에게 다음 미션까지 쥐어줬다.


"어차피 네가 머리를 잘라주니까 파마까지 도전해 보는 거 어때? 롯드를 사서 앞머리만 말아줘도 되잖아."


아뿔싸, 일이 커지고 있다. 아빠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남편이 10년 간 하나의 헤어스타일만 고수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남편의 머리카락은 그 어떤 파마도 무력화시키는 쭉쭉 뻗은 직모인 데다 자기주장이 강한 앞가마까지 있다. 남편의 앞가마는 한 점을 중심으로 모류가 둘레를 돌며 뻗어나가는데 앞머리를 특정 위치 이상으로 잘라버리면 머리가 붕 뜨면서 김무스가 돼버린다. 그래서 남편은 본인의 머리를 잘 아는 미용실에서 변함없는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러다 독일에 왔고 남편은 터키 미용실, 독일 미용실을 거쳐 내게 오기까지 온갖 가위손들의 마루타가 되어야만 했다.

그나마 독일 미용실을 1년 가까이 다녔는데 미용사는 남편의 머리가 익숙해지기는커녕 본인 컨디션에 따라 그날의 스타일을 완성시키곤 했다. 삐죽빼죽 튀어나와 들쑥날쑥 완성된 머리를 보고 오죽하면 회사 동료가 "머리 와이프가 잘라준 거야?"라고 묻기도 했다는데 아마도 그 말속엔 <돈 주고 자른 머리 아니지?>라는 속뜻이 담겨있었을 거다.


그 말에 심히 모욕감을 느낀 나는 남편의 머리를 직접 손대보기로 했다. 돈을 지불하고 모욕감을 느낄 바엔 공짜로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몇 년째 남편의 머리를 잘라주고 있는데 외모에 관심이 없는 남편은 내가 땜빵을 뚫어 놓던 옆머리에 맞춰 뒷머리를 바짝 올린 바가지 머리를 만들어 놓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어떡하냐는 나의 호들갑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을 넘어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 어차피 난 뒤에 보이지도 않는데 뭐"


(뭐라고? 넌 안 보여도 남들이 널 보잖아)


이 정도 실력이면 내가 남편에게 돈을 주면서 <제가 한 번 바리깡을 들어봐도 될까요>하며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남의식 전혀 안 하는 남편은 오히려 <잘라줘서 고맙습니다>라며 초보 미용사에게 꾸벅 인사까지 하곤 했다.


그런 남편이 파마를 하고 돌아와 달라졌다.

남편이 샤워한 후 욕실에서는 익숙지 않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위이이잉 드라이기가 소리가 멈추면 아빠가 준 에센스 뿌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늘 본가에서만 듣던, 아빠의 샤워가 마무리됨을 알리는 그 정겨운 소리다. 칙칙칙칙

그리고 자꾸만 거울을 본다. 파마가 풀리진 않았는지 귀찮을 정도로 내게 묻는다.


머리가 금세 풀릴 것을 대비해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빡세게 말았던 남편의 머리는 지금은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얼마 전 전화기 너머로 그 모습을 본 아빠는 자신의 설계에 무척 만족해하셨다.


"어후~ 머리 엄청 멋지다! 진짜 멋있는데? 이쁘다. 잘했네."


이어지는 아빠의 칭찬에 남편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면서도 그 칭찬의 효과는 대단했다.

에센스를 몇 번 뿌리고 말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남편은 변화된 머리를 유지하려 노력 중이다.

거울 앞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진 남편의 모습이 낯설긴 하지만 이제 막 외모에 눈을 뜬 사춘기 소년 같은 모습이라 무료한 내 일상에 그의 일거수일투족 관찰하는 재미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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