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태를 문 듯 쓰다’는 말이 있다. 소태나무의 속껍질을 의미하는 ‘소태’는 흔히 쓴 것들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데, 내가 자란 경상도에서는 소태를 매우 짠 음식을 가리킬 때 쓴다. 어째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너무 짜면 짠맛보다 쓴맛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매운 것을 먹었을 때는 통증밖에 느껴지지 않듯이.
2.
울음은 거꾸로 자란다. 사람은 태어나서 첫울음을 터트릴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삶의 지속 여부까지 좌지우지하던 울음의 크기는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위축되어간다. 울음의 위엄이 꺾이기 이전,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는 울음소리가 크면 클수록 장군감이었고 크게 될 아이였다. 비록 어른이 되어 가면서 비밀스럽고 수치스러운 행위가 되어버렸지만, 어렸을 때는 우는 게 자랑이었고, 유세였다.
3.
나는 지금도 눈물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유년시절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당시, 한 번 울면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내어 울었고, 또 그 소리만큼이나 가열하게 눈물을 쏟았다. 친구들은 종종 '쟤가 말라죽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곤 했다고 한다. 때문에 내 친구들은 등을 두드려 주거나 감싸 안아주는 대신 억지로 물을 먹이는 쪽을 택했다. 야무진 물고문 덕에 울음을 그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4.
어느 날도 펑펑 울고 있는데, 한 친구가 여느 날과는 달리, 달래지도, 물고문을 하지도 않고 빤히 쳐다만 보다간 내 눈물을 닦아 찍어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니 눈물은 안 짤 줄 알았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서러워서 스스로 내 눈물을 찍어 먹어 볼 정신 같은 것은 없었지만, 정신없이 우는 중에 입술 속으로 타고 들어온 눈물은 무던한 혀로도 조금쯤 싱거웠던 것도 같다.
5.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울음은 거꾸로 자란다. 지금의 나는 큰 소리로 울지 못한다. 소리도 줄었고, 눈물의 양도 줄었다. 설움을 인심 좋게 꾹꾹 눌러 담은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 테고,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테다. 물론 어른이 되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긴 하지만, 증명할 도리는 없다. 다만 지금의 내 눈물은 친구가 민물이라 우겼던 그 눈물과는 달리 쓰도록 짤 것이다. 그러니까, 마치, 소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