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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Dec 03. 2021

겨울의 목록

퇴사 후 삶을 씁니다. (열 번째 이야기)

겨울을 좋아한다. 추운 건 싫지만 겨울이 남긴 몇 가지 기억들이 늘 이 계절을 설렘으로 맞게 한다. 겨울이 올 때면 길게는 2~30년 전 짧게는 몇 해 전 반짝이던 그 기억들도 같이 찾아온다. 그때 그 장면이 마음속에 펼쳐질 때면 그때 느꼈던 감정들도 고스란히 지금의 나에게 전해져 온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빠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할아버지가 평생을 일군 집이었다. 너른 마당이 있고, 키가 큰 감나무 두 그루가 있던 시골집이었다. 겨울이면 유독 추웠던 집이기도 했다. 방문을 열면 바로 밖이 내다보이는 오래된 한옥집. 어릴 적 동생은 할아버지의 집을 늙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늙은 집은 눈이 올 때면 가장 설레는 집으로 바뀌곤 했다. 꽤 늦은 밤이었던 것 같다. 눈이 왔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방문을 열어 마당에 쌓인 눈을 확인하곤 동생을 깨웠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하얀 눈 때문에 밤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동생은 맨발로 마당까지 뛰쳐나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로 작은 발자국이 콩콩 찍혔다. 발이 시려서 오들오들 떨다가도 맨발로 밟는 느낌이 좋았는지 방에서 마당으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밖은 추웠지만 금세 달려 들어온 방은 따뜻했으니까. 그때처럼 눈이 설렜던 적이 또 있었을까. 겨울이 오면, 그리고 눈이 내릴 때면 하얗게 빛나던 그 밤이 늘 생각난다. 마당이 있고, 할아버지가 있고, 엄마 아빠의 젊음이 있던 그때 그 겨울이.      


또 한 번의 겨울은 고등학교 때다.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30분이 걸렸다. 다른 계절보다 유독 겨울은 등굣길이 더 멀고 무겁게 느껴졌다. 추위에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고 가방은 늘 무거웠고,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겨우 정류장에 내리면, 학교까지는 걸어서 또 10분 여를 가야 했다. 육교에 올라서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야 만나는 학교였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그 길은 겨울이면 유난히 찬바람이 강하게 느껴지곤 했다. 나는 그 길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겨울의 그 길을 좋아했다. 육교에 올라서면 탁 트인 길 위에 겨울 찬바람이 어김없이 불어왔다. 얼굴에 닿는 그 차가운 바람이 너무 좋았다. 만원 버스에 시달린 피로를 씻어주는 것 같았고, 차가운 기운보다는 상쾌하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얼굴에 닿는 그 바람을 느끼는 겨울이 그래서 좋았다. 딱 거기까지. 교문을 들어서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설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때 나의 겨울은 날마다 설렜다.      


그 후로도 사소하지만 반짝이던 겨울의 기억들은 차곡차곡 마음에 저장됐다. 엄마가 새로 꺼내 준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자던 겨울밤이 있었고, 하얀색 봉투를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던 붕어빵을 먹던 저녁이 있었고, 가장 먼저 캐럴이 흘러나오던 어느 커피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던 오후가 있었으며, 항상 차에 패딩을 넣어두고 내가 추워할 때면 꺼내 주던 남편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을 맞았다. 첫눈이 왔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직 첫눈을 보지 못 했고, 매서운 추위가 기승이라지만 나는 아직 두꺼운 코트도 패딩도 꺼내 입지 못 했다. 출근길 걱정이 없는 나의 겨울은, 그저 눈이 좀 많이 내렸으면 그래서 소복하게 쌓인 눈을 가만히 바라보는 천천히 지나가는 겨울이 됐으면 하고 바라본다. 올해는 또 다른 설렘이 나의 겨울을 채우길. 몇 년 후 다시 돌아볼 겨울의 목록에 올해 겨울이 꼭 자리하길. 오늘은 눈이 오지 않을까 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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