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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가르타 Apr 24. 2016

긴 휴식이 내게 준 것

목숨 걸고 지킬 소중한 무언가를 만들어갈 것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라도 저마다 닿아있는 지점과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다.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그 돌이킬 수 없는 세태의 갈림길은 더욱 선명해진다.


연인이 있으나 없으나, 수입이 많으나 적으나 언제나 내 마음 한구석에는 허기짐이 있었다.
나만큼의 시간을 산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소중한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다거나, 이미 스스로 수없이 생각해온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실현해내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종류의 은밀한 불안감과 허기짐을 가슴속에 두고 사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허기짐의 정체를 쫓는 중에, 나에게는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일만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부터 그러했다. 나를 스쳐간 모든 것들이 내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온전한 내 것이 되기 전에 떠나가버렸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미숙하고 불완전한 모습에 자책했고, 후회했고, 또 반성했다. 그리고 인생의 가뭄기와 같은 무료함이 수도 없이 찾아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몰랐으며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수도 없이 퇴사를 했고 짧은 직장생활과 잦은 이직을 반복했다. 그랬던 탓에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잃을 것이 없어서 당장 세상이 없어져도 딱히 아쉬울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희생’과 같은 개념의 말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겐 꿈꾸는 미래도, 오늘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에게 오늘의 원치 않은 모습은 삶 전체를 혹사하는 것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불행이었다.


내가 시도하려 했던 대부분의 것들에서 나는 자기 불구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긴 휴식기를 가졌다.


아무런 조바심이나 그 어떤 채찍질 없이 만 3년여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나의 자발적인 의지였는지 운명의 계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삶에는 조금씩 새로운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붙은 두 개의 이름이다. - 노발리스’


노발리스의 말처럼 나의 마음과 운명은 하나로 묶여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의 노선을 따라 나의 의지도 움직였고 또 내 의지에 따라 운명의 표지가 반응했다.




내가 지내온 3년여의 휴식기는 내 삶의 그 어떤 날들보다도 영적이었고 나의 의식을 몇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의 나는 프리랜서 생활과 병행하기 좋은 작은 사업도 하게 되었고, 휴식기 동안 새롭게 흥미를 갖게 된 영어회화학원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목표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내가 원하는 삶의 일부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내게 있어 소중한 것들을 내 주변에 차곡차곡 만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불안감이 자리하게 될지라도 나는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럼으로써 나는 더 이상 지킬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외로운 자유인이 아닌, 가진 것이라곤 초라한 맨몸뚱이의 나뿐이어서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내가 아닌, 더 완전함에 가까우며, 더 넓고 깊은 포용력을 가진 비로소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실패나 불운에 주춤할 수 있어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 나의 소신과 철학을 만들어가고 싶다. 어떤 부조리에도 반박할 수 있는 지성과, 어떤 텃세에도 굴하지 않는 멘탈을 갖기 위해 많은 경험을 쌓고 필요한 공부를 하고 싶다.


나에게 꿈과 목표란 단순히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하고 사는가라던가, 뜬구름 잡는 막연한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도달할 수 있는 나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의대에 간다던가, 음악가가 된다던가, 미술을 한다던가 하는 직업적으로 구분 지어지는 미래의 내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목표가 특별히 없어 조바심이 든다면 작은 단계를 건너뛰고 먼 미래부터 바라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일주일 뒤, 몇 개월 뒤 당장 코 앞에 있는 미래의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봐야 한다.


이때껏 내가 그려온 막연한 미래에는 언제나 조바심이 공존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어떤 조바심도 나지 않으며 미래를 그리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현재의 소중함을, 아직 꿈꾸는 중에 있는 긴장감을,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016. 4. 24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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