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
원영이 한 때 스튜디오에서 의상 담당이었을 때 상혁을 처음 만났었다.
추운 겨울이었고. 다들 추위에 몸을 오들오들 떨다 못해 한쪽에선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작은 불씨로나마 몸을 녹여 볼까 추리하기 그지없는 차림으로 옹기종기 무리 지어 모여있었는데, 조감독이었던 상혁만 홀로 까만 재킷에 구제 청바지를 입고 홀로 구석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었다.
워낙에 의상 담당 미술팀이라 사람 옷만 눈에 들어오던 원영은 거무튀튀하거나 붉으죽죽한 거적데기 같은 옷을 걸친 촬영팀과 조명팀과 연출팀만 보다가 군계일학처럼 깔끔한 옷차림의 상혁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히 하는 걸까?'
그 이후로 원영은 따로 상혁과 말을 섞어 본 적도 없고 딱히 끌리는 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일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럿이 어울리는 자리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원영이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상혁이 진짜 원영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는다는 점이었다.
꿈속에 그린 완벽한 남성복이 있다면 아마도 상혁이 입는 옷 이리라.
한 번은 볼링을 치러 간 적이 있었다. 구제 진한 청바지에 반쯤 접어 올린 구제 빈티지 라이트 블루 데님 셔츠의 반 마름모 꼴 황토색 포켓 디테일.
소품을 수집하기 위해 함께 창고를 뒤질 때는 사각형 로봇 캐릭터가 들어간 아기자기한 빈티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좀 있으면 새 핸데 집에서는 또 장가 안 가냐고 어머니가 잔소리하시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원영이 처음 상혁의 읊조림을 듣고 냉큼 말을 걸었다.
"그럴 땐 선물로 입막음하는 거 좋아요. 꽃 싫어하는 여자는 없거든요. 어머님도 여잔데 꽃다발 안겨드려 보세요."
"원영 씨한테도 보내드려도 될까요?"
아니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건가? 당황스러웠지만 원영은 하지만 싫지 않았다.
"전 꽃 싫어해요. 예전에 꽃꽂이 일을 해서요."
"저도 꽃 보낼 생각은 없었는데요. 크리스마스 카드 써드릴게요."
원영은 아직도 상혁의 노스탤지어에 빠져 있는 순수함에 스스럼없이 손바닥에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크리스마스이브 날 한 통의 연하장이 도착했다. 와인 병과 꽃그림이 그려진 단출한 크리스마스 카드는 마치 상혁이 입고 있던 의상처럼 덜어 낼 것도 더할 것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깔끔한 빈티지였다.
그렇게 원영과 상혁의 연락은 한 동안 끊겼다가 이후에도 종종 상혁은 원영에게 손 편지를 보냈다.
밸런타인데이 때 한 번.
현충일 때 한 번.
추석 때 한 번.
추수감사절 때 한 번.
원영도 그럴 때마다 답장을 써 보냈다. 상혁이 분명 고향에 계신 어머님 때문에 편지를 쓴다는 걸 잘 아는 처지라 원영은 책임감도 반쯤 느껴지기도 해서 상혁이 어머님께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며 대필을 한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런데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원영을 부르더니 날벼락같은 말을 전했다.
"원영 씨, 일이 없어서 그만 나와도 되겠어. 원영 씨야 워낙 손재주가 좋으니까 갈 데는 있겠지?"
"그거야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과장님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그러면 안되잖아?? 글쎄 조감독, 상혁 씨 있잖아? 아니 원영 씨가 의상 팀을 맡고 나서부터 의상이 몇 벌 없어졌다는 거야. 앞에선 그렇게 나이스 하더니 뒤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원영은 뒤통수를 맞아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 새끼 완전 꾼이잖아!! 앞에서는 사람 녹이고 뒤에서는 이간질을 하다니!.
촬영을 하다 보면 의상에 손상이 갈 수도 있는 건데, 철 지나고 헤진 건 처분하는 건데 알지도 못하면서 무서운 놈일세.'
원영은 그렇게 언젠가 상혁에 당한 만큼 되돌아주리라 별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