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 지도
연문은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습작이 여러 편 있지만 글을 쓰거나 책을 내서 생활을 하는 건 어렵다는 결론에 다달르고 어느 날 부턴가 종이를 찢고 취직을 했다. 다행히도 글을 쓰는 일은 계속 되었다. 사람이 한 번 배운 건 잘 사라지지 않는 터라 뭐든 이야기가 필요한 곳이라면 꾸며내고 지어내 하얀 종이를 메꿨고 비록 대단한 필력은 아니지만 정성껏 타자를 두드리며 이만큼의 라이프에 대해 별 불만은 없다고 자부했다.
회의실.
대표님과의 회의가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중이다.
벽 쪽 행어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드레스가 주루륵 걸려 있다.
"요즘 여자들 주세가 결혼 안하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팔죠?"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
"대표님? 대표님?!"
"내 말은...그러니까....자긴 안그래?"
"저 모태 싱글이고 대표님 이혼...했잖아요..."
"그 얘길 왜 꺼내...그러지 말고, 못되게 써봐."
"어..떻게...요.."
"가학적 사랑!"
"맞고 사는 여자 때리는 남자!"
"바이스 벌싸! 그거야 꼭 어떤지 구체적일 필욘 없잖아."
연문은 노력형이 아니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다.
그건 아마도 어차피 자신의 책을 출판하지 못할 거라는 상실감에서 오는 그녀의 순한 면모가 여지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글을 쓰더라도 방향을 잡아주고 콘셉트를 던져 주는 건 어디까지나 급여를 지불하는 최대표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녀는 까이고 말 제물이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절로 그만의 아이디어를 말하지만 오늘 만큼은 지루한 회의를 빨리 끝내고 싶다. 매사에 불만을 끌어 앉고 사는 그녀가 쿨하게 된 건 핸드폰 속 대화창 때문이다.
"저 오늘 약속이 있어서."
"무슨 소리야? 무슨 약속?"
"아저...그러니까...아는 선배요. 언니요!"
"그래? 그래. 나도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봐야겠다. 들어 갈께~~".
최대표는 그러고보니 이미 코트를 입고 있다가 가방 만 들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나간다.
'연철이니?'
'어! 원희언니!!'
'헐~ 어디야?'
'지금 가고 있는 중인데 밧데리가 없어서 핸드폰 꺼질것 같애. 이태원 8번 출구로 갈께.'
'나도 그 쯤 도착할 듯. 추운데 어디 들어가 있어. 괜히 밖에서 떨지 말구.'
연문의 핸드폰이 띠리링 꺼진다.
지하철 기둥에 기댄 채 까만 창 밖을 내려다 본다. 연문의 얼굴은 초췌하지만 미소를 짖고 있다.
남자처럼 버석버석한 더벅머리, 헤지고 보풀이 풀린 실밥 풀린 오래된 후드 티, 가짜 가죽 앵글 부츠에서 떨어지는 모래색깔의 부스러기가 너저분한 아지랭이가 주변으로 피어나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환하기만 하다.
전차가 멈추고 연문이 개찰구를 지나 나가는 쪽으로 걸어나가는데 출구는 모두 1번 부터 4번까지만 있다.
'8번이 없네?'
핸드폰은 이미 꺼지고 연락할 방법이 까마득한데 문득 눈 앞에 관광안내소가 띈다.
'저...핸드폰 충전 좀 할 수 있을까요?'
안내원은 핸드폰을 받아 C타입 핀에 꽂는다.
연문은 가판대에 꽂혀진 지도를 구경한다.
가평 열차 여행.
사찰사 투어 여행.
"이거 가져 가도 되요?"
"네. 여기 핸드폰 막대기 두 개 올라갔는데 가져가세요. 저희 이제 퇴근 시간이라서요."
"고맙습니다."
연문은 얼른 파워를 켜고 톡을 보낸다.
'도착했는데 8번이 없어욧. 1번으로 나갈께요.'
메세지를 쓰는데 핸드폰 전원이 또 나간다.
어기적 출구로 나가 하염없이 지나치는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파 속에 예기치 못한 약속 자가 나타나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