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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Aug 30. 2019

커피믹스는 회사에서 먹어야 제맛이죠

커피믹스에 사장님 쓴소리 한 스푼, 밀린 업무 두 스푼이요

나는 거의 열에 아홉을 가장 먼저 출근했다. 지각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는 절대 지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아예 인사팀에서 키를 받아서 출퇴근을 할 정도였다. 

일찍 출근하면 피곤하기만 하지 뭐가 좋냐고 물어볼 수 도 있는데, 피곤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집이 멀어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이왕 피할 수 없다면 키라도 받아서 회사 문이라도 따 보자는 묘한 쾌감이 공존했다. 그리고 출근을 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표 자리에 몰래 침을 뱉는 것도 아니고 밀린 업무를 시작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커피믹스를 타 마시는 일이다. 


탕비실에 들어가 가득 쌓여있는 노란 커피믹스를 보자 온몸의 세포가 드디어 기상한 것 같다. 재빠르게 하나를 집어 들어 커피믹스를 뜯는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오직 종이컵에 물을 붓는 소리만 가득하다. 정수기가 '꿀렁꿀렁' 소리를 내는 것 마저 재미있다. 제발 이 커피믹스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아무도 오지 말기를 매번 기도한다.

한 입 들이키자 커피믹스가 혈관을 타고 온몸에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제야 실감한다. 


아, 나 회사 왔구나.



가끔 탕비실에 커피믹스가 다 떨어진 날은 재앙 같았다. 텅 빈 커피믹스 상자를 보면서 할 수 있는 건 그 옆에 절대 마시고 싶지 않은, 그 누구도 잘 손대지 않아 가득 남아 있는 쌍화차 믹스를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그렇다고 내 돈 주고 커피믹스를 사 먹고 싶진 않은 이 심리는 참 이상하다. 회사 공고의 복지 중에 맨 아래에 적혀있던 '탕비실 음료 및 다과 상시 구비'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걸 봐서 그런가 보다. 


정 하는 수 없이 회사 밑 카페에서 원두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온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다. 


아, 커피믹스 마시고 싶다.



“트루씨, 우리 탕비실 음료랑 다과 주문하려고 하는데 원하는 거 있어요?”


물론이죠. 제발 커피믹스 좀 얼른 주문해주세요.


“음, 저는 커피믹스요.”


“그건 이미 있죠."


역시 회사엔 커피믹스 수혈을 받는 사람이 많다. 


더 웃긴 건 집에는 커피믹스가 단 한 개도 없었다. 원두커피는 있어도 따로 커피믹스를 구비해서 마시진 않는다. 몸에 좋지 않아서라기보다 회사에서 먹는 커피믹스가 절대적으로 더 맛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이어트라도 시작한 날에는 회사 가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하루에 많으면 3잔씩 먹던 커피믹스를 이제는 절대 마시지 않겠단 다짐은 오후 3시를 채 넘기지 못했다.


밀려드는 업무와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를 마치면 나는 생각이라는 걸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탕비실로 향하고 있었다. 다이어트는 무슨, 지금 내가 이걸 안 마시면 죽을 지경인데. 살아야 다이어트를 할 거 아닌가. 

커피믹스를 거칠게 뜯는다. 그 탓에 몇 알 튀어나간 원두를 재빠르게 종이컵에 도로 주워 담는다. 그리고 물을 붓고 커피믹스 뒷부분으로 힘차게 저어준다. 커피믹스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그제야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커피믹스, 이 정도면 국민 마약이라고 해도 되려나. 빵은 끊어도 이 커피믹스는 끊기가 힘들었으니.



지금은 프리랜서를 하다 보니 회사에 갈 일도 없고, 출근을 하는 일도 없다. 덕분에 보기 싫은 사람들은 안 봐도 되고 하기 싫은 일은 굳이 안 해도 된다. 심지어 커피믹스를 안 마신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역시나 집에 사다 놓고 마시진 않는다. 커피믹스가 간절히 당기지 않는달까. 프리랜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덜 피곤한가 싶기도 하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일로 엄청 피곤한 날에도 그때만큼 커피믹스가 생각나진 않는다.


그래도 아주 가끔 그 날의 커피믹스가 그립긴 하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조용한 사무실에서 비라도 내리는 날엔 특히 더 맛있게 느껴졌던 그 날의 커피믹스. 상사에게 깨지고 후임한테 치인 날이면 술 보다도 더 당기던 그 날의 커피믹스. 회사 동료들과 회의 때 보다 더 열띤 토론을 하며 새로운 커피믹스를 주문하고 마셔보던 그 날의 커피믹스.


회사랑 직장 동료는 안 그리운데 그 커피믹스가 유난히 그리울 때가 있다. 유난히 애쓰고 힘들었던 그 날, 부모님도 아니고 친구도 남자 친구도 아닌, 오직 커피믹스 한 잔에 따뜻하게 위로받던 그 날의 나를 떠올리며 말이다.


얼마 전에 전 회사의 인사팀 막내가 바뀌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인수인계는 잘했으려나 싶다. 다른 건 몰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무조건, 절대로 커피믹스는 상시 구비해놓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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