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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보다 혈액형이 먼저지

by 김트루

내 동생은 유난히 불의를 참지 못했다. 나보다 4살이나 어리고 키는 거의 10cm나 작은 녀석인데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건 웬만한 사내대장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모두에게 예의 바르다가도 아니다 싶은 건 바로 제대로 고쳐야 직성이 풀렸다.


예를 들어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면 노인이더라도 가서 줄이 있다고 정중하게 말을 한다거나,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바로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랑은 너무 다른 그녀의 성격에 가끔 힘들긴 했지만, 어쩔 땐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 주니 너무나도 속이 시원했다.


그래서 동생이랑 같이 다니면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내 동생이 너무 무서울 때가 있긴 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날의 기억 하나가 있다. 내가 결혼을 하기 전, 학생이었던 우리 둘은 엄마 선물을 산다고 그동안 모아둔 푼돈을 들고 화장품 가게에 갔었다. 화장품을 고르고 결제를 하려는데 화장품에 관해 설명하는 직원의 말투가 조금 상냥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계산만 잘하고 물건만 이상이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에 비해 동생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결제를 다 마치고 뒤돌아설 때, 포인트 적립을 해야 하는 게 생각이 났었다.


"아, 죄송한데 포인트 적립 좀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직원은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휴, 미리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리고 난 동생을 말릴 틈도 없었다. 이건 정말이다.


"뭐라고 하셨어요?"

"네?"

"포인트 적립 늦게 말한 건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아 네, 그렇죠.."

"그런데 굳이 사람 면상 앞에서 한숨을 그렇게 푹 쉬면서 말씀하실 필요가 있나요? 원래 말투가 그러세요?"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내 동생의 맞대응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직원을 달래랴 동생을 말리랴 포인트 적립은커녕 부리나케 동생 손을 끌고 나왔다.

직원 입장에서야 하루 종일 웃는 것도, 가끔씩 나타나는 무례한 손님 상대하는 것도 고역이겠지만 그런 걸 알면서도 '정중함'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고맙게 느껴지는 시대다. 그만큼 기본적인 예의 하나에도 사람들이 감동하는 요즘이니까.


'혈액형별 성격'에 대해 무조건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얼추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내 동생은 해가 지날수록 더 A형 같지 않았다.


보통의 A형은 '혈액형별 성격 테스트'에 따르면 소심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으며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한다. 정반대인 내 동생을 보며 그냥 A형의 돌연변이쯤으로 생각했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쁜 일도 좋게 넘기려는 나에 비해 동생은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 기준에 부모님도 예외는 없었다.


엄마는 한 배에서 어찌 이리 다른 둘이 나왔을까 궁금하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내 동생이 25년 차 접어든 어느 날, 우리 집에 날아온 내 동생의 종합 건강 검진표의 혈액형란에는 너무나도 뚜렷하고 까만 글씨로 'B형'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두가 경악을 하고 놀라는데 그걸 본 동생은 굉장히 태연했다.

"역시 난 b형일 것 같았어."


모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특히나 엄마는 분명 산부인과에서 A형이라고 알려줬다며 산모수첩을 찾기 시작했다.


"어쩐지 대차더라. 허허허."

아빠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동안 내 동생의 행동과 말들이 하나둘씩 짜깁기 되며 끝내 맞추지 못한 퍼즐을 그제야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혈액마저 내 동생은 어김없는 B형이라고 말하는데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적어도 A형의 돌연변이라는 말보단 B형의 정석이라는 말이 듣기엔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깐. 요즘은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민폐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인데, 동생은 그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뭐가 불편한지를 말할 줄 아는 사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종종 들려오는 동생의 B형 다운 경험담은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A형의 결계를 푼 녀석의 행보를 누가 말리겠는가. 그저 어디 가서 싫은 소리 못하고 꾹 참아 속이 문드러지게 썩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나보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mbti보다 혈액형을 먼저 맹신했던 민족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도 부탁한다, B형답게.

사람들 속에서 휘말리지 말고, 네 방식대로 불의를 콕콕 찔러가며 살길 바란다.

적어도 우리 가족 중 한 명은 속이 썩기 전에 뱉어내는 법을 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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