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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기저귀도 못 뗐는데 4세 고시라니

by 김트루

"영어 유치원 보낼 거예요?"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던 순간, 내 평온한 하루가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엄마는 여름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보다 더 뜨거운 감자를 던졌다.

시선은 나를 보고 손은 여전히 자신의 아이의 등을 밀어주며 물어봤다.


"고민 중이에요. ㅇㅇ이는 보낼 거예요?"

순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저도 고민 중이에요. 영어 유치원 보내려면 뭐 4세 고시인지 뭔지 레벨 테스트를 봐야 한다는데, 그것도 뭐 어느 정도 실력이 돼야 들어갈 수 있다더라고요. 같은 반 친구 보니까 벌써 영어 학원 다니더라고요."


그 후에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네에 내리겠다고 하는 아이 때문에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는 영어 유치원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온 지 아직 얼마 안 돼서 당연히 어린이집에 다닌 지 채 1년이 안된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우리 애는 알파벳은커녕 아직 기저귀도 완벽하게 다 못 뗐다.


그렇게 집에 와서 운동화를 벗자마자 거실로 달려가 장난감 주차 타워를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순간 알 수 없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 내 아이의 친구들은 주차 타워가 아니라 학원 타워에 들어가서 파란 눈의 선생님과 함께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정말 엄마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영어라는 말이 맞다.


'영어 유치원'이라는 단어 하나에 평온했던 나와 나의 아이의 일상이 한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 아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영어 유치원을 보내기 위해 학원에서 '4세 고시'를 준비하는 현실, 지금 이 현실이 내 아이가 숨 쉬고 있는 바로 이 지구,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 한국 부모들 사이에서 4세 고시는 낯설지 않다. 영어 유치원 입학시험을 위해 세 살, 네 살짜리가 시험지를 붙들고 있는 풍경. 서울 대치동 영어 유치원 등록금은 평균 월 150만 원을 훌쩍 넘긴단다.


거의 대학 등록금의 반을 한 달 동안 세 살 아이에게 쓰는 셈이다.

나는 대학 등록금 때문에 10년 동안 대출을 갚았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세 살짜리 영어 시험에 대학 등록금 반값을 퍼붓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돈뿐만이 아니다. 영어 유치원에 가서 정말 행복하게 영어를 배우며 스스로 학습에 대한 보람을 느끼며 성취감을 얻으면 좋은데, 현실은 항상 그렇지가 않다.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소아 정신과 외래 환자가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사회·정서적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기 전 과도한 주입식 학습에 노출되면서 심리 장애를 호소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거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우울증 등 정신건강의학 관련 질환으로 의원급 의료기관을 찾은 0~6세 아동 환자는 2만 7268명이었다. 2020년(1만 7938명)보다 1.5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놀고 울고 웃으며 감정을 배워야 할 나이에 시험 점수를 매긴다.

결국, 아이 마음은 놀이터 대신 병원 대기실로 간다.


내 아이는 알파벳 송은 재미로 부르기는 하지만, a가 뭔지 어떻게 쓰는 건지 전혀 모르고 알파벳 이전에 한글은 더더욱 모른다. 소변은 변기에 봐도 대변은 아직도 기저귀가 편한 아이가 학원에 가서 의자에 앉아 대변을 참고 있을 걸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했다.


"조기 교육이 경쟁력이에요."

"언어는 빠를수록 좋아요."

"지금 안 하면 나중에 뒤쳐져요."

"지금이 언어 황금기잖아요."


맞다. 영어를 배워본 사람으로서 언어는 어릴수록 빠를수록 좋은 게 사실이다.

지금 안 하면 그래, 뒤처질 수도 있다.

지금이 어쩌면 언어 황금기라는 사실도 맞다.
하지만 그 황금기를 하릴없이 책상에 앉아서 보내는 게 맞는 걸까?


아이는 지금 엉덩이 힘을 기르는 거보다 혼자서 계단을 한 발 두 발 올라가는 힘을 기르느라 바쁘다.

비 오는 날, 지렁이를 피해 가며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우산을 꽉 잡고 뛰어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는 영어 강사를 해봤고 그때 내가 직접 봤다. 빠르게 시작한 아이들이 언젠가는 버겁게 멈추는 순간을.

정답은 맞추는데 말은 안 트이고 단어는 외웠는데 문장은 못 만들고 테스트는 통과했는데 실상은 벙어리처럼 굳는 아이들을.


그래서 나는 내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입에 먼저 내가 불러주는 동요가 따라 나오고 그다음에 "Pick one!"이라는 작은 문장이 자연스럽게 나오길 바랐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빠른 성취보다 느리지만 분명 오래간다.


물론 경제적으로 나보다 훨씬 자유롭고 적절히 아이에게 영어에 대한 흥미를 더해주기 위해 영어 유치원에 보낸다면 그 또한 그 엄마의 선택이고 그건 자유다.

영어 유치원이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학부모와 아이가 잘못됐다는 것도 절대 아니다. 뭐든지 적당하고 적절한 게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어 유치원에 보낸 나의 아이를 보며 '이것 밖에 못하나?', '보냈는데 왜 한 마디도 못하는 거야?'라고 조급함을 가지는 그 타이밍을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다. 아이에게 아웃풋을 기대하고 기대한 만큼 그리고 투자한 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부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본인을 위한 영어가 되어가고 있을 확률이 크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초심 그대로 영어 유치원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나와 같은 선택을 한 학부모들에게 나의 글과 나만의 영어 교육법 그리고 그 안에 녹여든 위로가 적절하게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나도 이제 시작이고 내가 마주하는 처절한 실패들과 어느 날의 성공들이 이 글을 보는 학부모들에게 위로와 공감, 또는 적절한 해법을 가져다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내 글이 거창한 영어 교과서도 아니고 엄마표 영어의 지침서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내가 육아를 하며 매일같이 부딪힌 순간 속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단어와 문장을 쉬운 영어로 기록해 둔 생활기록이자 작은 자서전에 가깝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시작해 보았으니 한 번 내 글을 읽고 당신의 아이에게도 가볍게 한 번 툭 던져 보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이 쌓이면 결국 몇 주, 몇 달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부모가 전부인 이 시기의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은 어쩌면 결국 하루를 함께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엄마와 아빠다.

우리는 부모니까. 우리가 먼저 그들의 언어가 되어주면 아이의 말문은 결국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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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s://www.segye.com/newsView/20250827516126?OutUrl=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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