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Aug 24. 2020

여름나라의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벚꽃엔딩은 없지만 영원한 여름이 있는 곳 -  여름의 순간들 

열대 기후에 속하는 싱가포르에는 사계절 없이 일년 내내 여름이다.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고, 풍경의 색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서울에 벚꽃이 피고, 기나긴 장마가 오고, 은행잎으로 노랗게 도시가 물드는 동안, 싱가포르는 초록에 머문다. 이제 내게 여름은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몸처럼 붙어있는 존재이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 조금 시원한 여름 정도의 차이일 뿐.

  

독일의 저널리스트 슈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기억 속에서 시간의 길이는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고 한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록 흡수해야하는 정보가 많기 때문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출처: 링크]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일상이 반복되면, 정보의 흡수량이 많지 않기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런 점에서 여름 나라인 싱가포르에 살게 되면 시간의 흐름에 둔감해지기 쉽다. 매달 조금씩 변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오는 변화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런 지루함이 싫었다. 매일 그날이 그 날 같았다. 뜨겁게 머리를 달구는 태양이 싫었고, 훅 끼치는 습기가 갑갑했다. 등이 땀으로 젖어도 긴팔을 입고 햇빛으로부터 숨었다.

  

한낮의 뎀시힐 

신기하게도 싱가포르에 온지 1년에 접어드는 요즈음, 점점 햇빛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얇은 민소매 옷차림에 마음이 가벼워지고, 어깨를 감싸는 태양의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타지에서의 홀로서기에 마음이 지칠 때, 푸른 자연을 보며 걸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해가 질 무렵에 노란 빛에 부서지는 나무들이 정말 예쁘다. 

옥상에서 누우면 이렇게 하늘이 펼쳐진다 

여름은 옥상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루프탑의 수영장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고, 따뜻한 선베드에 누워서 파란 하늘을 마주한다. 

미팅을 하다가 고구마를 먹은 듯 속이 답답해질 때면, 수영장에 몸을 풍덩 내던진다. 햇빛에 조명이 켜진 것 처럼 물 속은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인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헤엄치고 있으면, 회사생활에 대한 걱정도 물결처럼 흩어져 버렸다. 한창 물 속에서 노느라 노곤해진 몸을 선베드에 누이고 물기를 바싹 말리다보면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 여름 휴가에는 엄마가 갓 쪄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찰 옥수수도, 솜털이 보송한 복숭아도 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긴 수다를 함께 할 친구도 없다. 바다도 갈 수 없다. 휴가 기분은 내기 힘들지만, 이대로 8월을 보낼 수는 없는 법이지. 연차를 내고 게으르게 하루를 보낼 만한 공간을 찾았다.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숨은 핫플레이스, 티옹 바루 (Tiong Bahru) 의 카페다. 



숲속의 과일 (Fruits of the Forest) 라는 이름의 차를 골랐다. 연한 딸기 색의 음료는 라즈베리와 블루베리 딸기를 고루 섞은 맛이 났다. 야외 좌석은 조금 습하지만, 천장에서 바삐 돌아가는 펜에 땀이 맺힐 겨를이 없다. 솜사탕 처럼 두툼한 구름은 파란 하늘 위에서 유영하고 있다. 카페 앞 건물 뒷편에 심어진 나무의 나뭇잎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팔을 교차해 테이블에 누이고 이마를 책상 위에 포겠다. 나른하고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어깨에 힘이 풀어졌다. 낮잠을 자지 않을 수 없는 날씨였다. 


무엇보다 이런 여름날이 좋은 점 중 하나는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맘껏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예쁘다며 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눌 때, 웃음이 퍼지는 짧은 순간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웰시코기의 짧은 다리가, 푸들의 씰룩이는 뒷태가, 마음이 부풀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오는 날을 좋아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