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적 없지만 사랑하는 도시에 관하여
계절이 바뀌었다는 핑계로 옷장 안의 옷들을 잔뜩 꺼내었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비워 내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입지 않을 것들을 골라내어 방 한편에 쌓아두기만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어느새 비워진 옷장 안 낡은 상자가 눈에 띄어 손에 들곤 '그렇게 찾아 헤맬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너도 참 주인을 닮았구나'라고 생각하며 작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더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들이 한 움큼 담긴 상자 속에서 몽마르트르 언덕이 펼쳐진 사진 엽서를 꺼내 들었습니다. 빛 바랜 사진 끝자락에 만년필로 꾹꾹 눌러 적힌 작은 알파벳만 남아있던 그 엽서. 그때 우리는 참 바보 같은 약속을 많이 했습니다. 차가운 밤공기가 내려앉은 것도 모른 채 골목길 계단에 걸터앉아, 가로등 불빛이 점멸할 때까지 밤을 새워 지키지 못할 약속들만 내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H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 파리에 가고 싶어
- 왜?
- 언젠간 세느강에 잠겨 죽고 싶거든.
그 말을 듣곤 말없이 웃었습니다. 문장에 담긴 우울이 폐 속 깊이 스며들어 한참을 무어라 답해야 할지 고민한 뒤 결국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로 했습니다."잠겨 죽을 거면 한강이 더 값싸고 빠르잖아." 어렵게 뱉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H는 킥킥 웃곤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말했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들 때문에 내가 너랑 친구 하는 거라고. 비행기 한번 타본 적 없던 우리는 아침이 찾아오기 전까지 ㅡ프랑스 파리가 품은 아름다움과 낭만에 대하여, 그곳에서 꽃 피운 예술과 향락들 그리고 마지막엔 세느강과 한강 중 어느 곳이 더 차가운지 대하여ㅡ 실없는 이야기들만 한참 늘어놓았습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난 어느 날 H는 제게 몽마르트르 언덕의 풍경이 담긴 엽서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약속해. 같이 잠길 거라고
-그래 그러자
근데 왜 세느강 사진엽서가 아니야? H는 멀뚱히 서선 건네준 엽서와 절 번갈아 쳐다보곤 한참 웃은 뒤 떠났습니다. 같이 죽자는 말엔 그리 쉽게 답하면서 뭘 그런 걸 궁금해하냐는 말을 남기곤. 그렇게 기억 속 파리는 낡은 엽서 위에 펼쳐진 푸른 몽마르트르 언덕과 함께 죽기로 약속한 차가운 세느강만이 남았습니다.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러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H는 더 이상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지만, 제가 뱉은 말은 유효하기에 프랑스로 떠날 때 굳이 파리를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끝내 유럽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수화기 너머 후회하지 않겠냐는 친구의 물음에 고장난 테이프 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파리에는 가지 않을 거야. 여전히 놓아주지 못하는 H를 사랑하는 것처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파리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삶을 마치기 전 파리엔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세느강을 눈에 담고 나면 머리끝까지 잠겨 다시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