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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Sep 26. 2021

20210925의 꿈

와롭고 슬픈 꿈


 이상하죠. 당신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무슨 영문인지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흐르더라고요. 그에 나도 놀라고 당신도 화들짝 놀라 어쩔  몰라 했지만, 나에게는  어둔 혼란을 단숨에 잠재울  있을 만큼의 화창한 확신이 있었어요. 누가 정해주거나 알려준  아니지만, 그건 분명 걷잡을  없는 사랑이었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슬픔으로 착각할 정도로 눅눅한 세계에 첫발을 들이게 된대요. 이게 바로 그거잖아.  위대한 걸음. 드디어 오래였던 요람에서 기어 나와 당신에게 걸어가요. 나는 오늘 당신  속에서 동화 같은 말들을 봤어요. 우리가 함께 걷는 방향을 향해 물결치는 하얀 사랑을 똑똑히 봤어요.


우리는 코스모스 군락이 천국처럼 펼쳐진 곳에 나란히 누워 가을을 반기고 있었어요. 숨소리만으로도 즐거운 대화가 되는 순간이었잖아요. 당신과 향이 좋은 빈티지 와인. 갓 구운 크로플 그리고 보라색 스웨터. 꽃과 꽃을 바쁘게 옮겨 다니며 꿀을 핥는 박각시 한 마리. 당신은 이를 보고 벌새를 처음 봤다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댔지만, 사실 그건 벌새가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한 번을 아니라고 한 적 없었어. 당신이 내 남은 생에 모든 정답이라 한들 아무렴 좋았으니까. 당신이 지금부터 겨울이 시작됐다 신호를 준다면, 나는 곧바로 옷장을 뒤져 가장 두꺼운 코트를 꺼내올 수도 있었거든요. 그럼 그 순간이 알록달록 크리스마스가 되고, 이곳저곳에서 경쾌한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눈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는 사랑이 바로 이런 거 아닌가요.


좀처럼 부푼 말을 잘 하지 않던 당신이 갑자기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꼭 넓은 들판 위에 집을 짓고 살자고. 한 품으로는 다 안을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개를 키우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사이좋게 산책을 나가자고. 혹 바닷가를 만나게 된다면 옷 젖을 걱정 않고 풍덩 빠져 놀아도 좋겠다고. 벌거벗은 채로 모래사장에 누워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가 문득 허기가 지면, 그대로 집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보자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멋진 식사를 대접하는 거라고. 그러다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별들이 싹을 틔우기 전에 잠자리채로 전부 잡아버리자고. 그렇다면 저 멀리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가야 하는데? 하며 내가 말했고, 둘이라면 다 괜찮아. 가진 게 서로뿐이라도 그건 고작 ‘뿐’으로 밀봉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잖아.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너무 거대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건 서로씩이나 되는 거지, 하고 당신이 답했어요.


나는 정말이지 이보다 멋진 대답을 본 적이 없는걸. 아마 살아생전에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대답일 거예요. 꿈이라면 또 모를까. 이러니 내가 어찌 당신을 애틋이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무서워 돌아가야만 하는 길 앞에서도 나는 당신의 그 대답을 생각할래요. 그럼 걸음이 저절로 성큼성큼 소리를 낼 것 같거든요. 모두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길 것만 같거든요.


갑작스러운 소낙비에 당신의 그 벌새도 우리도 모두 키가 큰 버드나무 밑으로 숨어들었어요. 나는 왠지 모르게 당신을 꼭 껴안아 주고 싶어졌고요. 그런데 그 안아주겠다는 말이, 한 번만 안아달라는 말이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어요. 문득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도 끝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거든요. 우리의 뒤편으로는 무궁화가 잔뜩 젖은 얼굴로 휘청거리고 있었어요. 색이 참 예뻤는데 용감함을 전부 잃은 듯했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깊숙이 잠드는 것도 참 힘이 들었어요. 두어 번 정도 마른 침을 꿀꺽 삼키니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당신이 사라졌어요. 열을 세면 당신이 다시 올까 싶었는데, 여섯쯤 세고 보니 정신이 조금 몽롱해지고 졸음이 쏟아지는 듯했어요. 전에 없던 깊은 잠자리에 들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요.


감긴 눈을 천천히 뜨고 보니 나는 변함없는 내 방 침대에 온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네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깊은 새벽인가 봐요. 꿈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당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었어요. 가장 완벽한 가을이자 신기루 같은 크리스마스 속에서요.


그 누구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 밤에 나는 너무 외롭고 슬픈 꿈을 꾼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개의치 마시고 끊임없이 떠나가세요. 하루 새 추워진 이곳에 혼자 남는 건 이제 꽤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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