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 가장 잘한 일 한 가지

아내와 결혼한 일

by 오류 정석헌

아내 덕분에 부모님 댁에 보일러 대신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보냈다. 올해도 거제에 계신 부모님께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시라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담아 선물을 보냈다.


강서 수협 직판장에서 맛 좋은 사과 한 상자와 아버지가 좋아하는 곶감을 샀고 여의도 현대몰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달달한 디저트로 파운드케이크 2개를 사서 보냈다. 손편지와 함께. 어릴 적 받기만 했던 선물을 이제는 하는 입장에서 바뀐 것이다.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기념일마다 손 편지를 쓴다. 처음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이후부터 줄곧 기념일이 되면 손 편지를 쓴다. 부모님 생신 때도, 구정 때도, 추석 때도 아내 덕분에 손 편지를 썼다.


사람은 기대하지 않은 선물에 감동한다. 자식들이 학교에서 써온 손 편지를 받으면 부모님들이 감동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은 그 어떤 선물보다 강력하다. 손 편지처럼.


나도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엔 부모님께 편지를 썼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까지였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편지를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아내를 만나면서 어릴 적 써봤던 편지를 다시 쓰게 된 것이다. 손으로 적은 편지를. 사랑하는 아버지께, 사랑하는 어머니께로 시작하는 그 편지를.


난 그동안 책을 3권 출간한 작가가 되었지만 손 편지 앞에선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해서 아내에게 뭐라고 적어야 해?라고 매번 물었다. 그럴 때마다 손 편지도 못쓰는 사람이 무슨 작가라며 아내는 내게 얄궂은 구박을 꺼냈다. 정말 뭐라 적어야 할지 까맣게 잊어버린 나를 그렇게 발견했다. 고마웠다. 아내에게.


손 편지를 쓰는 순간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내 안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 낯간지럽고 말랑말랑한 것들이 내 속에서 꿈틀 거림이 느껴졌다. 한편으론 좋았다. 한편으론 외면했다. 이상했다. 좋은 걸 외면하려는 나의 이중성이다.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라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2025년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면서도 그랬다. 난 또 아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시작해하고. 아내는 빈 A4 한 장을 내게 건네며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해 보라고 했다. 난 빈 A4 용지에 부모님께로 글을 적었다. 그러자 아내는 앞에 수식어를 하나 붙여야 한다고 했다. 난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하냐고 묻지 않고 아내를 올려다봤다.


아내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면서 '사랑하는'을 붙이라고 했다. 덕분에 손 편지를 시작했고 아내 덕분에 손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부모님께 카톡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한 줄만 보냈을 텐데.


작년 어버이날 손 편지를 써서 부모님께 건네던 날이 기억난다. 부모님은 아내와 내가 쓴 손 편지를 받으시곤 두 눈동자가 흔들리셨다. 어머니의 눈엔 눈물이 고였고 아버지는 잘 모르겠다. 목이 잠기셨나. 아무튼 그랬다. 아버지는 손 편지를 손수 우리들 앞에서 읽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래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손 편지를 냉장고 앞에 붙여 놓으셨다. 마치 사람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말이다. 47년 살면서 그렇게 뿌듯해하시는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셨다. 얼마나 좋으셨으면. 그때 내 안에서 '이렇게 좋은 거면 해마다 해드리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거창한 선물은 어차피 못하지만 작은 선물은 언제든 마음먹으면 가능하니까.


아내 덕분에 부모님 댁에 보일러 대신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보냈다.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받은 두 분이 각각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선물 고맙고 잘 먹겠다 하셨고 아버지는 이제 결혼했으니 이런 사치는 이제 부리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 고맙다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꼭 아버지는 현실적인 잔소리로 포장해 그 뒤에 본심을 감춘다. 그래서 본심을 파악하려면 힘이 든다.


아내 덕분에 부모님 댁에 보일러 대신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보냈다. 나 혼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아내 덕분에 해내고 있다. 고맙다. 이번 생을 통틀어 가장 잘한 일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 덕분에 매일 동심으로 돌아간 듯 재밌다. 진짜다.


아내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써야 하는데 물어볼 데가 없다. 큰일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다.


Merry Christmas~!!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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