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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10. 2018

해제(解除)를 위하여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그때나 지금이나 

가려진 선택지를 가진 사회는 

투명할 수 없다. 

겉으로 고고한 지식의 보고였던 

수도원이 끝내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투명하지 않은 사회는 

건강할 수 없고 지속되기 어렵다. 




울컥 치밀어 올랐다. 분노 노여움 기막힘 화 억울함, 격한 무엇이었다. 깊이 숨겨두고 못 보게 한 책이라니! 그토록 가혹하고 잔인한 방법이라니. 비로소 독자로서의 박탈감이 치밀어 올랐다.


《장미의 이름》은 책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책이다. 수련 수도사인 아드소는 책을 신성시하며 보관하는 것과 책을 만인에게 개방하고 대중이 원할 때 쉽게 대할 수 있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관점에 있어 갈등하고 고민한다. 아드소처럼 ‘나’도 그리고 많은 ‘읽는 이’가 책에 관한 태도를 취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과거(특히 인쇄술 발전 이전)에 이런 갈등과 고민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갈등과 고민의 이유는 책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과도 관련되어 있다. 책의 내용과 장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문자 해독력을 가진 이가 책을 읽는 데 쓰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책을 쓰고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든다. 시간과 노동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 

집필부터 인쇄와 제본 후가공까지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데 요구되는 시간과 인적 자원(사람의 노동력)을 계산할 때 책은 결코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책이 담고 있는 정보와 지식도 책의 가치를 높였다. 그러니 책은 비싸고 다루고 대하기 힘든 대상이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지 누구나 손쉽게 읽거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책을 높이 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들여 만든 책을 보관하기만 하는 것은 책의 효용성을 떨어뜨리는 것이고, 책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에도 맞지 않는다. 정보와 지식에의 욕구와 이를 공유하고 싶고, 읽고 싶을 때 쉬이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욕망이 존재하는 이유다.

책에 관한 상반된 태도와 고민 갈등은 인쇄술의 발전 이후 그 정도가 점점 줄었고 많은 부분 해소되었으며, 각종 매체가 등장하며 책이 가졌던 역할과 위상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책은 정보와 지식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고, ‘지식의 총체’ 이미지는 약화하였을지는 몰라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책에 관한 존중의 태도와 시각이 없어지지 않은 이상, 책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고민과 갈등 역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책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책을 비롯한 텍스트가 존재한 이래 꾸준히 이야기되어 왔던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고 또다시 읽으며, 그 책을 이해한 것인지 그 책에 설득당한 것인지 내가 느낀 ‘울컥’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울컥 치밀어 올랐던 감정은 시대로부터 야기된 것이었다. 나는 책이 대중에게 개방되어 누구나 어떤 책(대부분의 책)이든 대하고 읽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장미의 이름》에서 숨겨진 책을 보며 독자로서 박탈된 권리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을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반대로 중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숨겨진 책에 관한 감정은 나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는 책과 책읽기에 관한 열망과는 별개로, 그게 당연하고 일반화된 시대가 아니었다. 글자를 알고, 읽을 줄 알고, 읽어서 이해하는 사람의 수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읽기의 열망은 책으로, 책에의 욕망은 지식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읽을 줄 알아야 책과 지식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니, 당시의 독자층과 독자의 욕구가 지금과 같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중세인이 아닌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마음에 가 닿기까진 시대의 간극이 있었고, 이를 소화할 시간적 공간이 필요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인 내게는 숨겨진 책보다 열린 책이 더욱 익숙했고 당연했다. 누군가의 독서욕, 지식욕, 앎의 욕구를 제어하고 제한하며 봉인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장미의 이름》을 대하며 들어선 첫 생각은 박탈감이었다. 다음은 숨겨진 책에 관한 관심이었다.


금서(禁書)는 사회의 기준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열람 출판 공유 판매가 금지된 책은 그 책이 자리한 사회를 드러낸다. 수도원 장서관의 금서는 그 책을 숨기고 금서로 만든 자의 규칙을 나타내고 있다. 옳거나 그른 것은 상관없다. 옳고 그른 가치관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기준과 가치관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하기 나름이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누군가 정한 규칙과 규범의 문제이다. 어떤 이, 어떤 세력이 정한 바에 위배되는 모든 것이 금지될 수 있고 금서로 지정될 수 있다. 그러니 금서에 해당하는 책은 다음 시대, 다른 상황, 이후의 사회와 세계에서 규칙과 규범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의 기준과 가치관은 그다음 시대, 다른 상황과 이후의 세계에서 금지될 수도 있다. 

금서는 정하기 나름이고, 금서가 되는 기준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수도원에 잇따른 죽음을 불러온 금서는 당연하게도 수도원이라는 종교적 공간과 종교(또는 신앙) 그리고 종교를 둘러싼 논의와 관련되어 있다. 수도원의 누군가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의지, 기준에 반하는 책을 숨긴다. 역설적으로 그는 그 책의 보관자가 된다. 봉인된(어쩌면 보관된) 지식은 그에 관한 욕망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공간이 수도원이다. 중세의 지식인, 책을 만들고 읽는 대표적인 이들인 수도사가 모인 곳이다. 책과 지식에의 욕구가 높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숨겨진 책과 봉인된 지식은 곧 권력과 박탈을 동시에 의미했다. 다른 이는 못 읽게 하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책과 책 안의 지식은 권력(권력자)을, 숨겨진 책과 봉인된 지식에의 접근을 제한받은 수도사들은 자유로운 권리의 박탈(권력자에 대비되는 인물군이나 독자)을 의미한다. 


결국 아드소의 고민은 ‘책에 관한 자유로운 권리’가 일반적인 방향으로 풀려간다. 소수의 사람이 책을 신성하게 보관하는 입장과 책과 그 안의 지식을 많은 이에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에 있어 후자가 일반화된다. 열린 책이 숨겨진 책을 앞서게 되었다. 중세의 독자와 독서는 제한적이었지만, 지금의 독자와 독서는 개방적이다. 이제 모든 이를 독자와 예비 독자로 상정할 수 있고, 독서에는 기본적으로 제한이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제한이 있는 독서와 책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이 시대의 기준일 것이다. 옳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의미하기보다는 투명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시대 이 사회 어딘가에는 여전히 숨겨진 책이 있을 것이다. 숨겨졌다는 건 어떤 고고한 가치를 지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투명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투명하지 않다는 건 누군가가 아는 것을 다른 누군가는 모르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다른 이가 모르는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먼저’ 또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다른 이에 비해 우월한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불평등한 관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우월한 입장은 권력으로 치환된다. 누군가에게 제한된 권력이 존재하는 사회는 투명하지 않다. 투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평등하지 않다.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자유로이 나누는 가운데 숨겨진 앎, 지식, 정보, 책은 있을 수 없다. 


《장미의 이름》에서 책을 숨긴 이는 그 책이 다른 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한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판단인지 몰랐다(순수했던 것이 아니라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 책이 누군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든 이는 읽는 이가 선택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지, 다른 누군가가 정하고 보호해줘야 하는 바가 아니다. 평등하고 공정한 상황에서 다른 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읽기를 택할 수 있는 것은 투명하고 당연한 권리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은 투명하지 않다. 가려진 선택지를 가진 사회(이 책에서는 수도원)는 투명할 수 없다. 겉으로 고고한 지식의 보고였던 수도원이 끝내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투명하지 않은 사회는 건강할 수 없고 지속되기 어렵다.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 숨겨진 책을 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예정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독자의 노력과 욕망을 행하고 지지한다. 닫힌 책의 문을 여는 노력이 그 사회의 투명함으로 치환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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