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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17. 2018

변두리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의 무익한 노동과 방랑이 

내게는 유익했다. 

체험과 관찰이 글로 쓰일 때, 

그 경험의 유익함은 효용을 넓힌다. 




아빠는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장돌뱅이에 관한 로망을 갖고 있다. 나는 아빠가 절대 장돌뱅이가 되지 못하리란 것에 나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아빠가 장돌뱅이의 삶을 꿈꾸는 것은 떠돌이 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사고와 동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삶을 견뎌내고 행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당신이 젊어서부터 그러니까 내가 어려서부터 낭만가 기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아빠였지만, 많이 걷고, 불편한 잠자리와 화장실, 부족하고 거친 음식 등을 소화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책이나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떠도는 삶에 관한 소망을 꾸준히 그리고 여전하게 비추시지만 이를 행하거나 그 비슷한 행동(스무 살에 무전여행과 비슷한 아르바이트를 하신 적은 있지만)으로 옮겨본 적이 없다. 

아빠와 같은 이가 꽤 있을 거다. 변두리(극빈층, 떠돌이, 부랑자를 포함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그 계층) 삶에는 언뜻 낭만적인 정서가 깃들어 보일 수 있다. 가진 것 없이도 거침없고 정처 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방랑 생활은 은근한 동경과 지향을 받고 그 삶에 따르는 고충과 불편은 순간적으로 상쇄되곤 한다. 그러나 떠돌든 머물든 불편을 고스란히 취하며 행하고 견뎌내는 것도, 사회 소수자나 극빈층으로 대변되는 변두리 인생으로 치부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주체가 선택하지 않은 자유로운 생활은 반드시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선 동경이 실제로 행하는 데 이르지 못하는 이유다. 

어린 시절 허클베리 핀을 따라 봇짐을 만들어 집을 돌아다니던 걸 보면 내게도 변두리 삶에 대한 지향이 은근히 있었던 것도 같다. 나 역시 변두리 인생의 본질을 보거나 알았다기보다는 그 삶을 방랑으로 그리고 그 방랑을 여행이나 모험, 낭만 따위로 거칠게 환원했고, 상상화된 낭만성에 기대었던 거지 그러한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인식하고 사유했던 게 아니었다. 다행히 천천히 조금씩 이해를 넓혀갈 기회가 있었고,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접하게 된 건 그런 기회 중 하나였다.

오웰은 파리와 런던에서 변두리 삶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이러한 경험을 체험적인 언어로 옮긴 르포르타주이다. 그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 한시적으로 변두리 삶을 살았다. 오웰은 파리에서 접시닦이로 런던에서 부랑자로 거리를 떠돌며 도시의 변두리와 계층의 변두리 즉 주변부의 삶을 경험했고 체험했고 목격했다. 

그가 제국주의에 동참했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파리와 런던에서 무직자와 접시닦이, 부랑자 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오웰이 영국의 식민지 미얀마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한 것이 1922년부터 1927년까지인데, 파리에서 변두리 삶을 시작한 것이 1928년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민으로 식민지 체제의 관리였던 것은 당시에는 출세와 높은 지위를 의미했지만 그에게는 수치심과 부채감, 죄의식 등 내면적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이러한 내적 갈등과 부채감은 이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동물농장》 《1984》 등의 작품에서 정치권력과 제도권, 그 안에서 개인의 위치와 의미 등을 사유하며 고발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식민 체제에 봉사하여 식민지 사람과 상황을 억압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바를 이러한 문학적 행보로 모두 씻고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로서 그의 행보가 적어도 반성하는 태도에서 시작되었고, 자신이 이미 저지른 과오를 씻고자 노력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한 반성과 노력이 식민체제를 경험한 후 빠른 시일에 행해진 것도 의미를 더한다. 반성과 노력(사죄)에는 때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제때 하지 않은 반성과 노력은 진정성과 신뢰도를 담보하기 어렵다. 그것은 또 다른 과오이기도 하다. 

오웰은 자신만의 당위성을 가지고 한시적이나마 변두리 삶을 택해 파리에 머물고 런던과 그 주변을 떠돈다. 머물고 떠도는 것은 다른 행위 같지만, 그의 머무름과 떠남은 한 방향을 향한 것이었다. 변두리 삶을 경험하고 관찰하여 그 체험을 바탕으로 변두리 계층에 관한 사회 구조적인 개선의 의견을 개진하고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값싼 숙소를 구하고 적은 돈이 생기면 나중에 숙박비가 부족할까 싶어 숙박비부터 내고, 남은 돈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먹고 돈이 떨어지면 굶기를 반복했다. 돈이 없을수록 삶은 단순해지기 마련이라, 먹고 사는 이야기 특히 먹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같은 걸 먹는다. 약간의 빵과 포도주. 그러던 그가 러시아인 친구 보리스의 도움으로 접시닦이를 시작한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접시를 닦고, 정작 자신의 몸은 닦지도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고 잠에서 깨면 다시 10시간 넘게 접시를 닦는 삶. 고되다는 것을 넘어선 어찌 보면 무익한 노동에 관해 오웰은 비판적인 사유와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는 ‘변두리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이 자신이 하지 않고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불쾌한 일을 누군가는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접시닦이가 열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 동안 접시를 닦아야 하는 이유이고 원인이며, 소위 높은 자리에 있는 소수층이 대중에 대한 공포를 하층민의 무익한 노동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라고 이해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자유를 갖게 되면 그들의 자유가 위협받는다는 공포에 관한 인식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 단순하고 능률적인 작업 구조와 환경을 통해 변두리 계층의 삶이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리의 접시닦이 생활은 또 다른 변두리 삶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오웰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귀국 후, 일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부랑한다. 그는 다른 부랑자들처럼 부랑자 구호소에서 하룻밤씩 머무르며 다음 구호소로 노동력을 낭비하며 걷고 걸어 ‘구호소 순회’를 거듭한다. 파리에서 약간의 빵과 포도주 반병으로 연명했듯이, 런던에서도 역시 구호소에서 주는 빵 두 쪽과 홍차 정도로 간신히 삶을 이어간다. 부랑의 경험 역시 오웰의 비판적 사고를 끌어낸다. 

그는 부랑자가 게으르고 부랑하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비판하며, 부랑자가 부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원인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랑하도록 강제하는 법률에 있음을 지적한다. 부랑자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주거나, 하룻밤만 재워주는 구호소 방식을 바꿔 작은 텃밭을 가꾸고 그 결과물을 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안하고 있다. 그 자신도 이같은 해결책이 개략적일 뿐이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을 인정하지만, 변두리 삶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부랑자 걸인 하층부의 사람들에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편견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나 역시 그런 시각과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안쓰럽거나 무서웠고, 그들에게서 눈 돌리면 일시적으로나마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오웰과 같은 사회 상층부의 고급 관료도 아니고 그런 삶을 지향하지도 않지만, 내가 가진 평범한 일상성을 그들의 삶(일상)과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라 선 그어 놓으며 살았던 적이 있다. 그게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변두리 사람들과 변두리 삶, 변두리의 모든 것과는 다른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유치하고 나약하게 ‘안심’하고 싶었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알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던 기부를 조금씩 하고, 아주 가끔이지만 변두리 삶을 지원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 그들에 관한 시각을 바꾸고 긍정으로 환원하는 게 고작 내가 행하는 전부이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기 싫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소외 계층 안에 깊숙이 분명하게 들어가길 여전히 주저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지 오웰의 무익한 노동과 방랑은 내게는 유익했다. 그가 무직자 실직자 접시닦이 부랑자 생활을 단순히 체험하기만 했어도 대단하다고 여겼을 것 같다. 나는 어떠한 반성과 고뇌로부터도 행하지 못하는 (적어도 지금까지) 것이니까. 그의 체험과 관찰이 글로 쓰일 때, 그 경험의 유익함은 효용을 넓힌다. 

글이란 일차적 경험과는 다른 후차적인 반향을 낳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접시닦이와 부랑자를 글의 단순한 소재로 사용하였다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의미도 르포르타주라는 장르적 특징과 이 책의 의미와 성과도 한층 낮아졌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과 돈을 가진 독자에게 자신들과 다른 계층의 삶을 흥미롭게 비추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거나 도리어 없어야 할 책일지 모른다. 


변두리 삶에 머문 그의 시선과 그가 그들의 삶을 반영한 방식을 긍정하고 싶다. 여자와 유대인에 과도하게 부정적이고 날 선 선입관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어느 정도 허구적인 르포르타주임에도 이 책을 긍정하고 싶은 이유는 그 시선과 방식 때문이다. 변두리 삶과 그 안의 인물들 밖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자신과 다름없는 대상으로 대하고 보았던 움직임(시선)이었다. 

'다름'이 주는 곁눈질을 경계해야 한다. 변두리를 대하는 시선이 자신과 다르고 동떨어진 것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면, 그 인식과 시각에는 선입관과 편견이 들어서게 된다. 낭만적인 동경이나 안타까워하는 시혜적 태도이든 날 선 경계든 뭐든 그것은 같은 시각을 함의하고 있을 뿐이다. 선입관과 편견은 시야를 좁아지게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돕고 그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곁눈질이나 좁은 시야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서로를 똑바로 응시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오웰의 시선과 방식은 동등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선이 머문 자리를 따라 눈이 움직였고, 그가 비추는 방식에 따라 마음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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