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여름》, 알베르 카뮈
누구나 어떤 생명체나
평생‘ 케렌시아’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투우는 소와 인간이 대결하는 스포츠다. 그 스포츠의 목적이 인간과 동물이 대결하는 가운데 인간의 승리를 강조하고 축하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대결은 투우사의 승리로 끝난다. 소는 투우사와의 대결에서 어느 순간 죽음을 직감할 것이다. 투우에서 소가 마지막 숨을 고르며 쉼을 갖는 ‘의미적 공간’을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쉬는 곳이니, 케렌시아는 가장 편안하고 소중한 장소를 의미한다. 안식처나 피난처로 풀이될 수도 있다.
어쩌면 누구나 그리고 어떤 생명체나 평생 ‘케렌시아’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처럼 의식이 있는 생명체라면 의식적으로, 의식이 없는 생명체라면 무의식중에 자신만의 케렌시아를 찾을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도 쉼을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은 삶의 목표이기에 충분하다. 그 자체가 상징적인 공간이라 그 공간을 실제로 찾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찾았다고 여길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찾거나 닿기에 불가능한 공간).
케렌시아에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많은 이에게 그곳은 고향이 아닐런지. 특히 어릴 적 유년의 기억이 있는 고향이라면, 그 고향은 당시의 모습에 편안함과 아름다움이 덧입혀져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공간으로 기억되고 재생될 수 있다.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이다. 소가 마지막 숨을 고르는 공간처럼, 사람이라면 힘들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상징적 공간이 필요하다. 고향에 쉽게 갈 수 없어 늘 그리고 있을 때, 고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옛 모습을 잃은 상황 등 어떤 형태로든 고향을 잃은 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깊고 크게 가질 것이다. 그리고 고향의‘ 케렌시아화’는 더욱 폭넓고 깊이 있게 진행될 것이다.
고향을 그리며 자신만의 케렌시아를 아름답고 견고하게 구축했던 이로 카뮈를 꼽을 수 있다. 카뮈의 고향은‘ 알제리’이지만 그는 프랑스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향을 그리며 그곳의 아름다움을 수채화처럼 곱고 섬세하게 때로는 미몽간에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강렬하고 어지러이 그린작품이《 결혼·여름》이다.
〈결혼〉과〈 여름〉에 엮인 단편들에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를 비롯해 ‘오랑’ ‘콩스탄틴’ ‘티파사’ 등 알제리의 주요 도시가 등장하고 각 도시의 특징과 함께 그곳만의 향토적인 아름다움이 묘사되어 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단점인 것조차 작가에 의해 미화된 알제리와 그곳의 도시들은 카뮈에게 어느 곳보다 편안하고 소중한 대상이자 그의 케렌시아였을 것이다.
내겐 성북동 집이 고향이고 케렌시아인 것 같다. 그 집에 살 때 엄마 뱃속에 생겨나 태어나고 다섯 살 무렵까지 살았으니, 그곳이 내가 경험한 첫 집이고 첫 고향의 기억이었다. 한국인의 정서에 고향은 어렴풋이 시골 내음을 풍기지만, 외가와 친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 때 실향을 경험한 터라 한국에는 내가 고향으로 여기고 갈 만한 시골은 없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서울이니,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의 고향이었다. 서울이 고향이라서 도시를 좋아했고, 도시를 고향화하길 주저하지않는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그 집이 내게 고향이고 케렌시아인 것은 그곳에서는 온전히 기대기만 할 수 있어서였다.
나는 아기였고 조금 자란 후에는 아이였으니 집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기대기만 할 수 있었다. 책임 없는 무한대의 권리와 누구에게든 의지할 수 있는 태연함이 있었으니(어른들은 아기가 기대고 의지하는 걸 도리어 고맙고 즐겁게 여기기까지 하기에) 가장 편안했던 때였다. 고향이란 그런 곳이고 케렌시아란 그런 공간이다. 불편함 없이 안식할 수 있는 곳. 어쩌면 그 집 자체보다는 그 집에서의 시간이 고향이었고 나의 케렌시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편안했던 시간이다. 스쳐 가는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미화되는데, 가장 편안하고 소중한 공간과 시간의 기억엔 아름다움이 덧칠해지길 반복했다.
머릿속에 미화된 서울, 성북동, 그 집은 어느 곳보다 좋은 곳이었는데 후에 엄마의 입을 통해 들은 바로는 천장이 높아 웃풍이 심해 겨울엔 몹시 추웠고, 너무 넓어 새댁 혼자 청소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정원에는 철 따라 피는 꽃이 달라서 계절마다 아기(나)는 새로운 환호성을 질렀지만 덕분에 벌이 많이 날아들어 겁을 먹었고, 아빠가 꽃을 꽤 많이 뽑아내셨다고 한다. 온갖 꽃에 날아든 예쁜 나비마저도 내겐 겁먹기 좋은 상대였고, 오래된 주택이라 간혹 있던 쥐나 귀뚜라미에 소스라치기도 했다. 긴 복도가 있고 복도 양옆으로 방이 있는 구조였는데, 복도 끝 방이 내 방이었다. 엄마는 내가 잘 때 조심조심 일하시곤 했다. 끝 방에서 낮잠을 자던 난 설풋 잠이 깨면 엄마가 안 보이는 설은 풍경에 놀라 부엌까지 엄마를 찾아 다다다다 달려가서 엄마를 꽉 껴안곤 했다.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많았던 집이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옛 기억의 미화에 주의하지 못했지만, 카뮈는 영민하게도 고향 알제리에 관해 쓰기 전에 이런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조심했던 것 같다. 고향을 그리기에 앞서, 자신의 고향은 자신에게 사랑의 대상이기에 오히려 제대로 그리지 못할 수도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고향을 사랑하는 여자에 비유하며, 사랑하는 이의 매력을 하나하나 꼽을 수는 없고 그저 송두리째 모두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이 고장에 대하여 아주 명철하게 이야기할 입장이 못 된다. 그저 성의를 다한 끝에, 이를테면 좀 추상적인 방식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면의 어떤 디테일을 분간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글 안에서 그는 고향에 관해 객관적일 수도 구체적일 수도 없음을 솔직하고 영리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향의 기능이라면 무엇보다 힘이 들 때 힘이 나게 해주는 곳이라는 점이다. 카뮈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에서의 생활이 힘들고 고단할 때면 고향을 생각하며 힘을 냈고, 오랜만에 고향에 가서 힘을 얻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여름》에서 알제리와 파리를 몇 차례 비교하는데, 그 비교에서 파리는 단점이 많이 부각되고, 알제리는 장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카뮈의 비교는 그의 감정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파리는 지난 시대에나 지금에나 아름다움과 낭만, 패션과 화려함을 상징하는 도시 중의 도시다. 프랑스의 수도로 편리함이나 안정성 등에 있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알제(알제리의 수도)와 많은 부분 비교되었을 거다. 두 도시의 외적 장점들은 분명 파리가 우위에 있었을 텐데, 카뮈에게는 그런 부분들이 보이지 않았거나 무색했던 것 같다. 그는 알제리인이었고, 알제리는 그의 고향이었으니까.
그의 고향에 대한 사랑과 강렬하게 진행된 케렌시아화를 <알제의 여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땅과 맺고 있는 관계, 몇몇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을 느낀다는 것, 가슴이 제게 맞는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있음을 안다는 것, 한 사람의 얼마 안 되는 일생에 있어서 이만한 것이면 벌써 많은 확신이라 할 수 있다. 아마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이 이 영혼의 고향을 동경한다.”
카뮈에게 알제리는 완벽한 케렌시아였을 것이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먼지가 날리고 돌이 많은 것조차 그에게는 뛰어난 장점으로 여겨졌다. 도리어 파리에 대해서‘ 파리라는 도시의 거창한 곰팡이’라는 거친 표현을 썼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제국의 도시에 비해 부족하고 황량한 점이 많은 환경이었던 것은 그가 고향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데,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데 문제가 아니었다. 알제리가 상징하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이 중요했을 것이다.
카뮈의 알제리가 그랬듯이 고향이란 그리고 많은 경우 고향이 상징하는 케렌시아는 실제로 완벽하고 완전한 공간은 아니다. 그곳은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사고와 관념, 감정이 투영된 곳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자신의 케렌시아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완벽하고 완전하고 무결점한 곳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까. 고향의 기억이 없거나, 고향이 아름답게 기억되지 않았다면 다른 곳, 다른 공간, 다른 상징을 케렌시아로 삼을 수 있다.
내가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삶의 목적을 케렌시아에 둔다고 해도 괜찮을 수 있는 이유다. 자신이 가장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 안정감 있는 정서를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걸 의미한다. 카뮈는 실제로 가고 싶고, 감정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알제에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하고 원한 공간은 실제 알제와는 차이가 있거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그 장소, 지역에 갈 수 없었다고 해도 그는 그 정서를 떠올리며 안정을 느끼고 취했을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공간은 그가 떠올린 기억이고 취향이었으며 정서였다. 작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힘들거나 지칠 때 자신을 안아줄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공간을 찾는다는 것은 케렌시아가 삶의 목표가 되기에 충분한 이유다.
어쩌면 나는 성북동 집보다 더욱 편안하고 소중한 케렌시아를 새로운 지역이나 새로운 장소 또는 새로이 읽을 책이나 새로운 사유를 통해 마련하고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완벽하지 않은 목적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편안하고 다행한 일인지. 조바심치지 않고 내가 가장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