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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31. 2018

그에게 여행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적당한 환기를 위해

맞춤한

그와 나의 서울 길.




여행이란 마냥 즐거운 것도, 반드시 자의적으로 즐겨 행하는 것만도 아니다. 몸이 맘을 따라서 기분 좋게 즐기는 여행도 있지만 즐거움 없이 자의적이지 않은 방랑도, 정처 없는 걸음도, 목적 없는 시선과 관찰도 여행일 수 있다. 장소의 이동과 풍경의 관찰을 통해 일정한 사유와 감상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행이다. 그리고 마냥 유쾌하지 않은 여행도 여행자에게 일정한 영향과 나름의 효용을 줄 수 있다. 어디로 갈 곳 모른 채, 할 일 없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안을 떠돌고 걷길 반복하던 구보 씨의 걸음도 여행이었다.

깊은 생각과 고민에 잠겨, 심각한 갈등을 앞에 두고, 어떤 이유로든 집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정해둔 곳 없이 걸음 하는 때가 있다. 이럴 땐 아주 낯설지 않은 곳을 무의식중에 쭉 이어서 걷는 게 좋던데, 해결 못한 문제나 상황을 앞에 두고 아주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건 치우지 못한 쓰레기를 두고 방문을 닫는 것만큼 꺼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듯 낯선 환기가 필요한 것이지 모든 걸 버려두고 멀리 떠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책임을 미룰 수는 있어도 놓아버려서는 안 되듯이.

내게는 인사동에서 삼청동까지 이르는 길, 안국역에서 시작한 서촌의 골목골목이 적당한 환기를 위해 맞춤한 길이다. 사람이 몇 있어 외롭지 않았고, 붐비지는 않아 호젓이 거닐기에 좋았다. 그러한 걸음이 바라던 바도 아니었고, 원하던 바가 아니기에 진심으로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여행은 사유와 감상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이고 계기였다. 적어도 나를 붙잡았던 생각과 고민, 갈등을 한순간 놓아버리고 기분전환할 수 있었으니까.


구보 씨는 매일같이 밖으로 나간다. 특별한 사무가 있어 나가는 것은 아니다.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청년이 뭐 그리 밖에 볼일이 있겠는가. 월급 자리를 구할 생각도 없이 밤낮 책 읽고 글 쓰며 밤까지 돌아다니는 까닭에 딱하고 답답해 보이는 그의 마음은 더욱 딱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까지 건너가 공부한 소위 지식인인 그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건 쉬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아마도 짐작했듯이 구보 씨는 일을 찾지 않는 게 아니라, 일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일이라고 다 같은 일이 아니니까. 그의 생각과 취향과 신념에 맞는 길을 찾는 게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그는 1930년대 개화기 지식인이었다.

구보 씨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해 건너가, 종로 네 거리와 화신상회 백화점을 지나 전차에 뛰어오른다. 그가 탄 전차는 동대문행으로 동대문을 돌아 경성운동장 앞으로,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성북동으로, 종묘 앞으로 운행한다. 전차는 방향판을 한강교로 갈고 훈련원을 지난다. 전차 밖에서도 구보의 걸음은 다방과 다방 옆 골목 안에 있는 젊은 화가의 골동점을 지난다. 남대문과 경성역, 조선은행을 거쳐 다시 다방으로 돌아간다. 다방에서 나와 종로 네거리의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 하얗고 납작한 조그만 다료를 거쳐 대창옥, 광화문, 경성우체국 근처 황금정까지 그의 걸음과 일상은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게 아니라 그때의 필요에 따라 진행된다.

어쨌든 학업을 마친 스물여섯의 성인이 집에만 머무를 수 없는 노릇이라 집 밖으로 나온 터다. 그러나 지금 말로 백수인 그가 갈 곳은 마땅찮아 원치 않는 서울 방랑을 계속한다. 갔던 데를 다시 가기도 하고, 많은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며 어떻게든 버거운 시간을 때우려 한다. 딱히 바라던 게 아니어서 그렇지 구보의 서울 방랑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경로는 다채롭고, 그의 걸음이 머무는 곳의 신문물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흥미롭다. 화신백화점 엘리베이터, 기차역과 기차, 전차 등. 

구보의 상황과 마음이 편안했다면 개화기 서울을 넉넉히 돌아보는 일상여행에 다름 아니다(일상여행이라함은 개화기 서울이란 공간은 곳곳에 신문물을 두루 갖춘 신기한 도시일 수도 있지만, 구보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에게 서울은 새로운 곳 이전에 익숙한 삶의 공간이라고 할수 있다. 비록 그가 직업을 못 가져 생활인으로 기능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원해서도 아니고 편치 않은 맘으로 행한 여행이지만, 아무튼 서울을 여행하던 그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그가 떠나온 뒤의 변한 동경을 보고 싶어 하고 그게 어렵다면 좀 가까운 데라도 오십 리 이내의 여정이라도 떠날 수 있길 바란다. 조그만 슈트케이스를 들고 경성역에 서면 행복할 거라 믿는 그는 도회의 소설가는 도회의 항구(경성역)와 친해야 한다며 자신의 바람에 적당한 이유를 붙이기까지 한다.

구보가 이토록 여행하길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되도록 멀리 그러나 그것이 불가하다면 가까이라도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시공간이 편치 않아서일 것이다. 그런 그는 완전한 해결은 되지 않을지언정 일시적인 해방을 맛보게 해줄 여행을 통해 현재의 시공간을 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떠한 환기가 필요했을까. 구보의 상황과 처지, 심정을 헤아리려면 1930년대라는 시공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시기, 공부를 많이 했건 아니건 지배당하는 입장이던 식민지 사람은 일본인에 비해 취할 수 있는 직업, 생각할 수 있는 바람, 삶의 선택권이 넓지 않았으리라. 구보는 그 시기를 살던 사람이다. 그는 식민지인이었고 뚜렷한 기술이나 업무를 익힌 이도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방황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배우기는 많이 배웠으나 배운 걸 적절히 쓸 수 없는 좌절감과 자괴감을 근처에 두고 사는 식민지 지식인이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그의 눈에 신문물은 퍽 새롭게 보였을 것이지만, 그러한 새로움이 이 예술가에게 즐거움이나 긍정적 자극을 주기에는 그가 놓인 근대는 너무도 비정상적이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일본에 의해 이식된 근대였다.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시기에 놓였고,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행할 수는 없었던 것은 그 시기와 능력이 일제 식민지 아래 파행적 근대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보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한가로이 서울 여행이나 할 수 없던 때에 역설적으로 서울을 두루두루 여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기보다 한걸음 떨어져 관찰하는 걸 택한다. 그러나 구보의 여행을 무위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구보가 서울을 여행하며 관찰하는 외면 풍경에 그의 내면 풍경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하고 고민한다. 될 대로 되라는 것이 아닌 생활인(소설가 또는 창작자)으로 나아갈 수 있길 고민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매일 반복되던 어느 여행 끝에 생활을 갖고 좋은 소설을 쓸 것을 결심한다. 1930년대 개화기 지식인이었던 구보에게 서울 여행이 나름의 의미와 효용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그가 외롭고 고독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여행을 하며 쉼 없는 관찰을 통해 나름의 사유와 감상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얻지 못했을 거다, 다시 결심할 수 있는 힘을. 

모두가 독립투사가 되어 싸우고 희생할 용기를 가지진 못했을 수 있다. 구보는 다만 소시민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제한된 시공간에서 좌절을 수시로 겪고 난 후 다시 결심하기까지 여행이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여행이란 미처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하거나 쉽게 풀리지 않던 것을 풀어내는 효과를 지녔으니까.

마냥 방 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서울 여행이라는‘ 움직임’을 행했던 구보의 소극적 행동과 대처를 응원하고 싶다. 오후 두 시, 일을 가지지 못한 구보가 다방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레코드를 들으며 고민하던 마음에 공감하고 싶다. 모두가 갈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한 군데 갈 곳 없던 식민지 지식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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