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발터 뫼르스
독자와 작가를 위한 공간은
결국 같았다.
가장 좋은 글은
주변 일상에서 시작된다.
제목부터 끌린 책이었다.‘ 책들의 도시,’ 머물고 싶은 세계이며 공간이었으니까. 책들의 도시란, 더구나 ‘꿈꾸는’ 책들의 도시란 무엇일지. 큰 규모의 도서관일까 아니면 크고 천장이 높은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푸시킨의 서재 같은 공간이 이어지고 이어진 곳일까.
어린 나는 그의 서재가 탐났다. 푸시킨의 작품보다 정작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생전에 쓰던 서재였다.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그의 단편을 모아둔 책으로, 표제작은《 대위의 딸》)이 푸시킨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 작가와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지면에 그의 초상이나 그를 결투로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던 아름다운 아내의 초상, 그가 생전 쓰고 아끼던 물품 등의 사진과 함께 작가의 서재가 있었다.
푸시킨의 서재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냥 본 게 아니라 사진에 코를 박고 보길 반복했다. 그의 작품을 읽다가도 앞장으로 돌아가서 서재를 곱씹어 보곤 했으니, 그 서재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어른이 되면 저런 서재를 꼭 가져야지. 지금까지도 이루지 못한 위시리스트의 상단에 올려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푸시킨의 서재와 같은 서재를 마련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천장이 높은 방 벽을 따라 천장까지 닿는 높이의 고동색 책장이 쭉 둘러져 있고, 앤틱하고 고급스러운 눕기에도 기대기에도 편한 침대 겸용 긴 소파, 가로로 널따란 책상, 운치를 더하고 글을 읽기에 부족함 없이 낮게 깔린 조명, 글을 읽다 떠오르는 생각을 적기에 편하고 여러 권의 책과 노트를 어지러이 놓아두어도 다소 지저분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책상, 무엇보다 높은 책장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이 있는 완벽한 서재. 완전한 읽기의 공간.
그토록 맘에 드는 서재를 그때 이후 못 봤고, 어느 작가의 어떤 서재를 보고서도 그렇게 완벽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당연하게도 그와 같은 서재를 갖거나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꽤 들 거다. 서재가 이렇게 안락하고 큰 규모인데 서재를 품고 있는 집은 또 얼마나 편안하고 커야 할까. 완벽한 집은커녕 적당한 집을 구하기도 힘든 요즘이니. 어려서 그의 서재를 탐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서재를 부러움을 넘은 욕망으로 바라고 있다.
푸시킨의 서재라는 서툰 상상과 짐작으로《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처음 대했다. 책들의 도시라는 것을 알기 위해, 그게 어떤 공간일지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실은 이미 그‘ 답’에 지난 경험과 사유를 투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세계문학전집 푸시킨 편, 앞장에 있던 그런 서재가 이어지고 확장된 것이 내게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였다. 답을 정해두고 읽은 책이었고, 구체적이고도 막연하게 ‘책이 많고 책을 읽기에 편안한 공간’을 꿈꿨다.
우습기도 하지. 나는 푸시킨의 서재 비슷한 걸 가져본 적도 없다. 처음 살던 집에는 아빠의 서재가 있었지만, 내가 그걸 이용하진 않았다. 그 후로는 내 방은 있어도, 내 서재도, 다른 가족 누구의 서재도 없었다. 그리고 난 어디에서고 책을 읽는 사람이다. 공간을 가리지 않고 장소나 환경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책 안으로 들어가곤 하는데, 정작 머리 한구석에는 ‘책 읽기에 완벽한 공간’을 늘 꿈꾸고 있었다니. 평생을 책 읽기에 완벽한 공간을 꿈꾸고, 그런 공간을 평생(아직까지는) 갖진 못한 사람이라는 이 역설이 우습다. 게다가 나는 책을 읽고(독자로서), 쓰고(작가로서), 만드는(에디터로서) 사람이다. 내 삶은 분명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책 안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책들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역설이다.
역설적인 상황과 사고 안에서 완벽한 ‘읽기의 공간’을 찾던 나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으며 그 공간을 찾기도 했고, 못 찾기도 했다. 이 책에서‘ 읽기의 공간’은 완벽한 ‘쓰기의 공간’과 겹친다. 그곳은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린트부름 요새의 젊은 시인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주인공, 이하 미텐메츠)는 대부의 유언으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원고를 가지고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난다. 그는 시인의 이름도 고향도 얼굴도 모르지만 고서점에 무작정 들어가 보고, 작가 에이전시의 말을 일단 믿어보며 여정을 이어간다. 그리고 불행한 사건으로 꿈꾸는 책들이 가득하지만, 위험한 곳, 부흐하임의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책은 패러디와 상징, 은유로 가득하다. 책과 출판, 인쇄에 관련된 물건이나 직업군, 상황 등이 패러디를 통해 새로이 표현되고 있다. 주인공이 공룡인 것은 시인이라는 직업과 그들이 쓰는 텍스트를 인류 역사에서 앞장을 차지하는 공룡만큼이나 오랜 역사성에 빗댄 것일 수 있고, 한 작가의 전 작품을 비롯해 그 작가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암기하는 부흐링들은 독자와 작가 전작주의 연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책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유머 있는 화법 자체도 패러디를 암시하는데, 패러디라는 것은 유머와 웃음 없이는 논할 수 없는 작법이고, 장르이기 때문이다.
미텐메츠는 아직 글을 책으로 출판하지 못한 시인이다. 그의 젊음은 미숙함과 가능성이라는 상반된 특징을 가리키며 나타내고 있다. 여정의 초기에 미텐메츠는 작가라기보다는 독자, 특히 일방적으로 작가의 견해와 사고를 받아들이는 제한적인 독자의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그는 지하세계를 헤매며 차차로 의문과 질문을 넓고 깊게 품는데, 특히 그림자 제왕과 스승과 도제의 관계를 형성했을 때는 그림자 제왕의 말과 가르침을 곧바로 신뢰하고 믿기보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과 질문을 이어간다. 작가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문’과 ‘질문’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인물로 변모하는 것이다.
미텐메츠는 수용자적인 태도의 독자에서 비판적인 작가의 모습으로 서서히 진화하며, 독자로서도 작가로서도 소극적인 부분을 버리고 적극적인 자세와 대응력을 나타낸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러한 깨달음은 그의 직접적인 설명으로 노출되거나 행간을 통해 매우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완벽한 읽기의 공간을 찾던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깨달음은 ‘읽기의 공간은 쓰기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독자로서 좋은 글을 쓴 작가를 찾기 위해, 좋은 책을 읽기 위해 읽기의 공간을 찾다가 타의에 의해 지하로 간다. 그러나 결국 그 안에서 그는 독자로 그리고 작가로 성장한다. 독자와 작가를 위한 공간은 결국 같았다.
미텐메츠는 지하세계에서 끊임없이 도시로 돌아가는 것을 꿈꾼다. 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존재에서 구원자가 되고, 다시 스승이 되고 결국 친구가 된 그림자 제왕 역시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하보다‘ 꿀꺽거리는 소리, 쿵쿵 밟는 소리, 덜컹덜컹 흔들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덜그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톱질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도시 부흐하임으로의 귀환을 꿈꾼다. 미텐메츠와 그림자 제왕이 꿈꾸었던 것처럼 작가에게 맞는 공간은 지하세계와 같은 저기 어딘가에 있는 특별한 공간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숨 쉬고 살아가며 생동하는 에너지가 있는 ‘일상의 공간’이라는 것이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가장 좋은 글은 주변 일상에서 시작된다는 당연한 진리. 읽기의 공간은 쓰기의 공간과 겹치니, 일상의 공간이 곧 완벽한 읽기의 공간이자 쓰기의 공간인 것이다.
내가 나에 관해 또렷하게 기억하기 전부터 나는 책을 좋아했고 책 읽기를 즐겼다. 그리고 내가 기억이란 것을 가진 후 오랫동안 책과 관련된 것, 일, 책과 관련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왔다. 이 애정에 기반 해서 나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비현실적이고 완벽한 공간을 꿈꿔왔다. 그런데 책 안에서 읽은 것은 결국 내가 이미 그러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공간에서 살고 있으니까. 덕분에 나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으며 기대했던 바를 찾지 못하기도 했고, 찾기도 했다.
답을 구하지만 이미 답을 정한 책 읽기는 실패하기 쉬운데, 다행히 나는 운 좋은 독자였다. 찾지 못하기도, 찾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또 찾을 것 같다. 책 읽기에 완벽한 공간과 상황, 방식을. 그 공간과 상황이며 방식이 어느 곳에 어떻게 놓여 있을지 알지 못해서 찾고 있지만 내 주변에 있을 것만은 분명하다. 미텐메츠가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림자 제왕이 고통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돌아가고자 했던 공간은 이미 내가 잘 아는 곳이다. 시끄럽지만 생동하는 소리와 특별하게 보이거나 느껴지진 않지만 평범하고 소중한 삶과 생명이 분명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그곳은 익숙하고 낯익어 더욱 소중하고 반짝이는 일상성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 공간을 이미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찾을 수 없는 걸 알기에 다행이다. 끊임없이 찾을 수 있고 바랄 수 있어서. 채워지지 않는 한 욕망은 끝난 게 아니다. 독자는 끊임없이 읽을 것(책)과 읽는 것(독서) 그리고 읽기의 공간을 꿈꾼다. 끝없이 쓸 것(글)과 쓰는 것(집필) 그리고 쓰기의 공간을 바란다. 읽는 이와 쓰는 이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 욕망은 겹치고 이어진다. 겹치고 이어지며 끝나지 않는 욕망만큼 책과 책 읽기의 공간(글과 쓰기의 공간)을 욕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책과 읽기(쓰기)에 관한 욕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