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리는
작업실이자 문학살롱이었으며,
일상의 공간이었다.
1920년대 파리에서
젊은 헤밍웨이는
가난했고 행복했다.
프랑스 하면 카페가 먼저 떠오른다. 수다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토론과 이야기를 나누며 카페를 즐기고, 그곳에서의 시간을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들. 프랑스 사람들과 카페 그리고 카페가 많은 파리는 자연스레 이어지며 연상되는 것들이다.
특히나 작가들의 작업실, 문학살롱, 예술의 성지로 기능했던 파리의 카페들은 오래전부터 나의 관심 대상이었다. 두 번째 파리 여행 전, 대학 교양강의 때 불문학 전공 교수님이 프랑스 특히 파리에 가면 카페에 꼭 가보고 그곳을 즐기기를 당부하셨던 걸 떠올렸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카페를 눈여겨봤다.
카페는 내겐 작업실이다. 되도록 집 근처(30분 거리)에 자리하고, 1인 테이블이 넓은 편이며 장시간 이용 가능하고(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까지 이용하는 편이라, 24시간 카페를 선호한다. 음료 한 잔으로 자리 비용을 때우진 않고,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도 카페에서 해결하는 편이다), 조용하지만 백색소음이나 낮은 음악이 깔리고, 깨끗한 화장실이 건물 내에 있는 카페가 작업실이 된다. 앞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곳은 없지만 웬만큼 충족하는 곳은 꽤 있다.
첫 책《 여행의 취향》을 작업할 땐 집 주변 카페 몇 곳을 돌아가며 이용했다. 요즘엔 책이나 글 작업, 편집 업무도 늘어 도서관형 카페 한 곳을 정해두고 글을 쓰고 다듬는다. 도서관과 비슷한 시스템을 갖춘 조용한 곳, 음료 한 잔을 마시며 자리 대관하는 데 이용 요금이 비싼 건 아니지만, 한 달이면 웬만한 작업실(고급스러움은 배제한 작업실) 비용만큼 된다. 그래도 작업실보다 카페가 좋다.
책이라면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읽지만, 책과 관련된 ‘작업’은 좀 다른 문제다. 난 의무감이 지워진 일은 도리어 부담이 앞서 잘 안 되는 편이며, 아침잠도 많고 부지런하기보다는 게을렀다. 어느 일요일 오전, 마감이 느슨한 일을 두고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걸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일을 위해 일어나는 걸 그냥 무한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이렇게는 영영 일을 못 마치겠다 싶어 집 근처 카페로 갔고, 하루 분량의 일이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이전까진 일이 되든 안 되든 집에서 작업하던(나 자신을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체 뭘 믿고) 내가 카페를 작업실로 인식하고 활용하기 시작한 때였다.
집에서는 의자에 앉기보다는 기대고 싶고, 기대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기 마련이다. 자신의 게으르고 산만한 면을 좀 덜어보고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평소에도 자주 가던 카페에 더욱 자주 가게 됐다. 아무리 편안한 카페(침대나 빈백이 있거나 바닥에 앉는 자리가 있는 카페)라도 집에서처럼 편히 앉고 누울 수는 없었고, 더더구나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르는 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적당한 긴장과 각자 다른 일이지만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가벼운 동류애도 느끼며 작업에 열중하다 보면 일이 수월히 진행됐고 미루지 않고 효율적으로 끝낸 일 덕분에 죄책감에서 쉬이 벗어날 수 있었다. 작업하다 지치며 혼자 쉼을 즐기면 됐고, 우연히 만난 친구나
부러 부른 지인, 나를 찾아온 이와 발랄한 시간으로 쉽게 옮겨갈 수도 있었다.
카페가 작업실로 기능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작가 이상이 그랬고, 헤밍웨이가 그러했다. 오히려 지금보다 오래전, 카페의 면면은 더욱 강조됐을 게 분명하다. 지금이야 갈 곳도 즐길 거리도 많은 시대지만, 이전에는 갈 곳도 할 것도 지금보다 적었다. 일반인들에게도 그랬고, 특히나 사유와 상념이 많은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갈 곳과 할 것을 동시에 채워주는 공간이었다. 많은 작가가 카페를 작업실로 이용했고, 그곳은 작가들이 모여 서로의 사유를 나누고, 서로 같은 꿈을 지지하고, 서로 다른 이상을 드러내며 토론하는 문학살롱으로도 기능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공간은 필요한 법이고, 작가라면 더더구나 작업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그곳은 카페였다, 특히나 파리에서.
카페라고 한정할 것 없이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작업실이고 문학살롱이었다. 특정 카페 아닌 많은 작가의 작업실과 살롱(카페)을 품고 있는 도시인 파리는 위의 기능을 대표했고, 너무도 적절히 수행해왔다. 그리고 그 기능의 수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나의 나라, 한 도시, 한 지역, 어떤 카페가 작가에게 글쓰기의 공간이자 문학살롱이 된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프랑스, 파리, 6구, 생제르맹 데 프레 교회 앞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가 그랬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카페 ‘브라스리 리프(Brasserie Lipp)’가 그랬으며, 노트르담 대성당 옆 도시의 숲 같은 살롱과 도서관으로 기능해온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와 같은 서점이 그랬다.
헤밍웨이. 파리에 있는 카페를 작업실로 택했던 작가로 그가 떠오른다. 하필 프랑스, 파리 출신의 유명하고 훌륭한 많은 작가를 제쳐두고 (역시나 유명하고 훌륭하지만) 그를 떠올리는 건 그도 나처럼 이방인으로 파리를 경험했고 사랑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파리를 무대로 삶을 일구고 작업한 이방인 작가 역시 많지만, 노년에 회고록을 통해 파리에서의 젊고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한 헤밍웨이의 파리에 관한 애정은 다른 작가들이 파리에 관해 느끼던 감정을 넘어선 것 같다. 그간 경험해온 그의 작품으로 미루어 그를 무척 단호하고 강인하고 큰 스케일의 면모를 보이는 작가로 여겨왔는데, 파리에 관한 에세이《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을 보니 소탈하고 섬세한 면도 못지않았던 이 같다.
센 강변 낚시꾼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행복을 느끼고, 아내와 센 강변을 거닐다가 괜찮은 포도주를 한 병 사서 집으로 돌아와 소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즐거워하던 파리의 이방인 작가. 돈이 없어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보증금 없이 대출하며 쩔쩔매면서 한편으론 뿌듯해했던 사람. 카페에서 크림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작업에 몰두했고, 작업을 하다 보면 쉬이 배가 고팠다던 아이처럼 솔직했던 이. 그에게 파리는 작업실이자 문학살롱이었으며, 일상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삶이 파리의 낭만을 불쑥불쑥 비집고 들어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유머와 여유와 즐거움으로 넘길 줄 알았던 사람이 헤밍웨이다.
카페를 좋아하고 즐긴다고 해서 어느 카페나 다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작가라면 맘 주고 정 붙이고 유독 편한 카페가 있기 마련이다. 그에게 그곳은 카페 ‘클로저리 데 릴라스(이하 카페 클로저리)’였다. 헤밍웨이는 카페 클로저리 테라스에 앉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시간에 따라 달리하는 빛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소탈한 낭만과 함께 집필에 몰두했다. 이곳에서 하루의 집필을 잘 마무리하고 옷 깊숙이 집필 노트를 넣던 장면이 반복해서《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에 등장한다.
그를 찾는 누군가도 클로저리에서 그를 기다렸고, 헤밍웨이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작가와의 토론을 이어가던 곳도 그곳 테라스였다. 웨이터 몇과 알고 지내며 그들의 삶에 존중과 연민을 느끼던 곳도 그 카페였다. 카페 클로저리, 크림커피, 노트와 펜이 있다면 헤밍웨이에겐 충분했다. 그는 단골 카페에서 많은 단편을 집필했고 습작을 계속했다. 그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작업실이었을 거다. 그래서 반갑지 않은 사람이 그곳을 찾자, 카페 클로저리는 ‘나의 공간’ 임을 분명히 하고, 매몰차게 이곳에 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약속까지 받아내던 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1920년대 파리에서 젊은 헤밍웨이는 가난했고 행복했다. 당시 프랑스를 넘어 세계 예술의 성지로 기능했던 파리에는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문화적으로 풍요했고 긍정적인 전망과 분위기를 지녔던 파리와 그 시기를 가리킨다.)’ 감수성을 지니고 있던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 중에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작가들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비롯된 상실감으로 길을 잃어버린 미국의 지식층과 청년층을 가리키는 이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가 헤밍웨이다.
기자였던 헤밍웨이가 작가의 길을 시작한 곳이 파리였다. 그의 옆에는 첫 번째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이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세대’를 정의한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모더니즘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 등과 교류하고 소설 작법 등을 배우며 일종의 작가수업을 시작한 곳도, 그의 첫 장편소설《 봄의 격류(The Torrents of Spring)》를 썼던 곳도 그 도시였다. 작가로서의 첫출발과 첫 아내와의 결혼 생활, 첫 소설. 파리는 헤밍웨이에게 많은 ‘처음’을 선물했던 공간이다. ‘처음’이란 서툴기 마련이지만, 서툰 만큼 설렘도 크고, 설렘은 많은 경우 행복으로 이어진다.
작가에게는 그때의 가난도 행복도 귀했던 모양이다. 노년에 이르러 그 시기의 많은 것을 상기하고 곱씹고 그려냈다. 어쩌면 아름다운 색이 덧입혀졌을지 모르는 파리에서의 기억은 당연한 결과다. 시간은 평범한 기억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든다. 파리의 모든 것이 그에게 글을 쓰게 만들었고, 특히 클로저리라는 작업실에서 노트를 빼곡히 채우며 습작할 수 있었고 집필을 이을 수 있었으니까.
작가에게 집필은 행복이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헤밍웨이처럼 자신이 주인인 양 여길 정도로 아끼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잠시 잠깐 머물던 쓰기의 공간들에서 나 역시 즐거움을 느꼈다. 좀 더 아끼며 머물기 좋은 곳을 찾아볼 생각이다. 파리 어느 카페 아니 이 세상 어느 카페가 나의 ‘클로저리 데 릴라스’가 될지, 그곳에서 헤밍웨이가 집필 노트를 채우듯 노트북의 집필 파일을 채워갈지 시간을 두고 찾아볼 일이다. 어쨌든 글쓰기를 이어갈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