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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Nov 21. 2018

텍스트를 대하는 이, 은신처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작업에 집중하고

온전히 즐기기 위해

그는 고독마저 선택했다.




새벽 두 시, 집중력이 조금씩 흔들리고 이해력도 서서히 떨어지는 시각. 나는 부러 검은 장정의 얇은 책을 붙잡고 있다. 이 시각을 기다린 때문이다.

첫 장부터 셋째 장까지 읽은 후 덮어버린 책,《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렇게 읽을 책이 아니야. 132페이지의 얇은 책을 한 시간도 안 되어 읽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읽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때를 기다렸다. 그(소설의 주인공 한탸)와 비슷해지기를 기다려 읽기 시작했다. 몸이 힘들고 머리가 몽롱하며 혼란스러운 상태를 기다렸다. 시곗바늘이 초침마저 새벽 두 시를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책을 펼쳤다. 기다려온 시간과 이야기에 설렘이 느껴졌지만 곤한 몸은 나의 기분과 엇서며 몽롱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기다려온 시간이니, 한탸의 절박함과 고통 갑갑함 답답함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에 두 손으로 책을 ‘부여잡고’ 간신히 시선을 책에 고정했다. 한 장 한 장 책의 두께와는 달리 얄팍하지 않은 그의 삶이 들어왔다. 힘들고도 행복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그의 삶의 부분들이 동시에 느껴졌다. 억지로 둔 시선과 손길이 편할 리 없다. 눈이 피로하고 어깨가 뻐근하고 자세가 여러모로 불편했다. ‘힘들다’고 느꼈다. 서서히 조금씩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그의 침침한 눈과 굽어진 어깨가 느끼는 고통이 자연스레 옮아왔다. 그의 작업 공간과 삶에 드리워진 어둠이 내게도 덮여왔다.

그 시간, 그 공간에 나만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외로움과 고독감은 창문 너머 어둠 속 몇 남지 않은 불빛이 대변했다. 나만 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한탸가 느꼈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서러움’인 동시에, 어두운 작업 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안에서 밝게 빛나는 지식을 얻고 사유하는 기쁨’ 두 가지로 대체됐다. 홀로 깨어있단 느낌이 주는 두 갈래의 의미 덕분에 주인공은 힘든 순간을 편안하게 느끼는 모순을 가졌을 것이다. 어둠과 신체적 곤함을 오히려 편케 느끼는 한탸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읽어가며 이해하리라, 삼십오 년째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하는 어느 폐지압축공을.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 1장부터 3장까지 반복되는 사실을 통해, 나는 한탸와 이 책의 작가 흐라발이 한탸의 삶의 의미를 어떠한 무게로 강조하고 싶은지를 느꼈다. 그 무게는 3장 이후에도 비슷한 문장과 같은 사실을 통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새벽 두 시, 나의 힘든 몸과 마음에도 같은 중량감이 더해져 왔다. 한탸가 ‘압축’하는 ‘압축기’라는 말에서부터 그 느낌은 반복적으로 지속되었다. 압축기로 책을 압축하는 반복 동작, 반복 행위, 반복 작업.

반복은 최초에는 그에게 고독과 외로움, 무기력함을 주었을지 모른다. 더미로 뒤덮인 공간에 덩그러니 있는 압축기와 그. 그의 현재와 미래에 놓인 것은 압축기로 압축하는 일뿐. 더미 속에서 보석 같은 책 한 권, 반짝이는 글 한 줄을 발견하기 전 압축기는 책과 종이만이 아닌 한탸와 그의 삶도 짓눌렀을 거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무더기 속에서 한 권의 책과 한 문장 그리고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의 더미에 불과했던 것을 자신의 꾸러미로 만들어갈 때, 압축기는 그와 그의 삶에 의미를 주고 이를 지속시키는 소중한 도구가 된다. 책과 사유, 꾸러미가 소중한 탓에 그의 작업은 더뎌지고 상사의 불만을 사게 되지만 한탸는 꾸러미 만들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더욱 열심히 꾸러미 만들기를 계속한 건 꾸러미가 자신이 쌓은 지식과 확장된 사유의 총체였기 때문이다.


한탸가 꾸러미를 만드는 것을 유심히 봤다. 그는 지하실로 쏟아진 책들로 자신만의 꾸러미를 만든다. 본래부터 책이었던 것으로 다시 책(꾸러미)을 만든다. 그러나 그가 만든 책은 원래의 책과는 다른 것이다. 한탸가 꾸러미를 만드는 작업은 책을 만드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책이라는 완성품을 가지고 다시 책을 만드는 과정을 행하는데, 그는 책더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울리고 머리를 깨울 만한 것을 세심히 고른다. 책이 되기 이전 원고를 고르고 발굴하는 것과 유사하다. 세심하게 고른 원고를 자신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엮는데, 이는 편집을 의미한다. 그렇게 엮은 책에 명화 복사본을 이용해 표지까지 부여하면 그의 책이 완성된다. 그는 이렇게 완성된 책을

남모르게 자신만의 공간에 잘 보관해둔다.

그가 꾸러미를 만드는 것은 책을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실은 책만이 아닌 책을 포괄한 텍스트를 다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탸는 압축기로 책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특정 책이 아닌 매우 다양한 장르와 사상, 정보를 담은 책과 문서, 그림 등의 각종 인쇄물을 대한다. 그 인쇄물들은 매우 능력 있는 편집자라도 다루고 소화하기 힘든 양과 종류의 텍스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를 선별하고 취합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런 능력을 갖추지는 않았겠지만(누군들 그런 능력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겠냐

마는), 그는 지하실로 쏟아진 온갖 종류의 책을 대하고 다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성, 텍스트의 정보와 성격에 따라 텍스트를 선별하고 취합한다. 텍스트를 분별 있게 읽어내고, 자신만의 책으로 편집하는 것이다.

그가 텍스트를 읽고 편집하는 작업에서 나아가 텍스트를 보관하는 것에도 노력을 기울인 데서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날 발견한 책들, 그는 그것을 다른 이에게 알려 잘 보관될 줄 알았지만 그 책들이 예상했던 대우를 받지 못하고 ‘방치(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방치-필자 주)되는’ 것을 경험한 뒤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텍스트를 보관한다. 그의 보관 방법이라야 자신의 집과 일터 후미진 곳에 책을 ‘방치’하는 것이었겠지만, 그는 ‘방치’라고 표현했지만 차라리 그것은 ‘은둔’이었다.

책의 은둔이었다. 분명한 목적성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둔은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 책들을 읽지 못하게 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방치되거나 함부로 대해질 텍스트들을 보호하는 것이기에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가 텍스트를 읽는 이(독자)임은 물론 이를 선별 취합 활용 보관하는 텍스트의 편집자이며 텍스트의 보호자(은신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지식을 담고 사유를 이끄는 텍스트로 꾸러미를 만들고, 이를 보관하며, 은퇴 후에도 이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소련의 침략 아래 공산화된 체코에서 책에 관한 것을 넘어 텍스트에 자리한 한 글자조차 자유로웠을까. 그 상황에서 한탸는 텍스트와 이를 엮은 책에 관심과 정성을 기울인다. 텍스트의 의미를 알고 텍스트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안다. 그 작업 과정이 그가 일하는 이유이자 기쁨이었고, 그의 취미이고 삶의 목적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중세 수도원 도서관에서 책을 보관하던 수도사에 못지않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탸는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의 꾸러미에 깊은 애정을 갖는다. 더불어 꾸러미를 만드는 공간과 압축기에도 매우 개인적인 애정을 드러낸다. ‘내 꾸러미’ ‘내 기계’ ‘내 지하실’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데서 한탸의 일(꾸러미를 만드는 일과 압축기로 책을 압축하는 일)과 일하는 데 쓰이는 도구, 일하는 공간에 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일은 현재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행해질 즐거움이었다. 그는 믿었다. 35년째 압축기로 작업해왔고, 그 일을 하며 은퇴를 맞을 것이며, 은퇴 후에도 같은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믿었다. 은퇴 후에 자신이 쓰던 압축기를 사들이기 위해 저금했고, 압축기를 둘 곳을 생각해뒀다. 정원에서 하루에 한 꾸러미씩 꾸릴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압축기와 함께할 것이다. 아마도 평생 계속될 수도 있었던 즐거움은 하필 그의 삶이 사회 ‘전환기’에 걸리게 되며 이루어지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5년 후면 한탸의 은퇴였다. 시대의 전환과 사회의 변화가 조금만 늦게 진행되었다면, 그는 바라던 삶을 살고 행복할 수 있었다. 실수로 버려진 책들을 통해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그가 거대하고 더욱 성능 좋은 새로운 압축기와 함께 그의 일을 잃게 되자, 그는 멍청하고 (이전의 작은 그의 압축기보다도) 미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육체노동자이지만 책과 텍스트, 문화의 가치를 알고 이를 즐기던 교양인 한탸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가 안쓰럽지 ‘만은’ 않다. 한탸의 삶은 고독했고, 그의 직업은 심신을 편치 않게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고독도 직업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자신을 또렷이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이가 돈을 위해 일하고, 취향과 취미를 돌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때때로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도 삶은 힘들 때가 있다. 고유성을 누리고 취미를 즐겨도 어려운 순간은 존재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갖고 싶은 직업을 가져도 일하는 건 쉽지 않은데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한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폐지압축공이라는 일과 직업의 시작이 어떤 것이었든, 그는 분명 일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인지했고,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어떠한 텍스트로 꾸러미를 만들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만족하는 직업을 갖고 그만의 고유함을 즐기고 지켰던 이를 마냥 안쓰럽다고 할 수 없다. 그에게 전부인 책과 살아가는 삶 그리고 책을 읽고 자신만의 책을 만드는(꾸러미를 꾸리는) 작업에 집중하고 그 작업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그는 고독마저 선택했다. 다시 태어나도 폐지압축공을 선택할 것이라는 그의 말은 현재의 직업에 관한 선택과 긍정이기도 하다. 한탸의 고독한 삶과 직업적 모습을 읽어내며 어쩌면 힘든 것과 즐거움(또는 행복)은 같은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의 마지막은 퍽 긍정적이진 않다. 그러나 그의 최종 선택을 이해한다. 비난할 게 못 되고, 공감하지 못할 바 아니다. 삶의 목적과 지향을 잃은 사람이, 가장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이 평소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그건 삶이 아니다. 지옥이다. ‘그럼에도’라는 말은 그의 경우 의미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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