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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Jul 23. 2023

쉬어가며 읽는 책

어떤 책은 단숨에 읽히고 어떤 책은 그렇지 아니하다. 때때로 나는 책을 일부러 쉬어가며 읽는다. 한 문장이나 한 단락,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소화할 시간이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책이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후자에 가깝다. 소화보다는 상상이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마다 책 속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상상을 걷잡을 수가 없다.


마치 유리창 한가운데에 쿵 하고 망치질을 하여 순식간에 금이 가듯이. 그런 모양으로. 알 수 없는 깨짐의 무늬로. 이야기가 번진다.


나의 머릿속에는 한 장의 그림 같은, 복잡하고 묘한 이야기가 한 번에 떠올라버린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골똘히, 그리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본다. 혹은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어떤 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별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관찰할 뿐이다. 그는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며 나와 눈을 맞춘다. 그저 그뿐이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고 나는 묵묵히 그 삶을 관찰하며 글을 쓴다.


때때로 그의 삶은 나의 삶과 겹친다. 오늘 그는 Y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Y는 중학교 때 오토바이 사고로 명을 달리 한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어쩐지 그는 자신을 책망하며 Y의 장례식에서 목 놓아 울었다. 조모의 상 중에도 많은 눈물은 흘리지 않았던 그다. 그는 눈물을 흘릴 구실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마쯤 그를 따라다니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도 걸음을 멈췄다. 이쯤이 되어야 나는 다시 책을 손에 잡을 수 있다. 나의 머릿속은 텍스트의 들어오고 나감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이 들어오면 글로 뱉어내기 전까지는 더 이상 새로운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순례를 떠난다. 나도 그와 함께 순례를 떠난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만의 순례도 시작될 터이다.




image: https://unsplash.com/photos/c1YrcFYW6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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