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란 Jul 04. 2022

생의 의미

그리고 반드시 찾아올 그것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즉 불공평한 사건이다. 생의 시작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발생하는 '강제' 사건이다.


흔히 사춘기 시절 자주 말하는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라는 말은 생이 강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님이 그랬던가, 불행한 사람은 애초에 태어날 수조차 없다고. 불공평하고 강제로 시작된 생이기는 하나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행운 하나 정도는 손에 쥐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본다.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삶이 몇이나 될까. 삶의 시작 이후의 시간들도 누구나 다르게 흐른다.


그리고 왜 사람들은 공정과 공평한 삶을 추구하고 그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게 정말 바람직한 것일까? 삶은 시작의 순간부터 불공평하고 강제적인 것이다. 우리가 적어도 공장에서 찍어내듯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개인 삶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가진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세상과 삶은 굴러간다.(작동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스며 든다. 남는 것은 부족한 곳으로 이동한다. 너무 적은 자도 불행하지만 너무 많은 자도 불행에 빠진다.


그런데 우리에게 완전히 평등하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끝(죽음)이다.


그것이야 말로 늦든 빠르든 갑작스럽든 예고되었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완벽하고 완전하게 공정하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것 또한 강제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일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양태와 과정은 각기 다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공평하나 양태와 과정은 다르기에,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불공평하고 강제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는 “공평하게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이다.


그리하여 본질적이고 깊이 있고 원대한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루하루의 작은 행복을 찾거나 산책 길에 우연히 만난 고양이와의 눈 맞춤을 하며 미소 짓거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를 맡는 행위를 평안히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으로 하여금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행위 중 하나다. 그 작은 행위 하나가 나비처럼 날개 짓을 계속해서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만들어내곤 하니까.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꾸만 모여서 영향을 주고받는 습성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왜 삶의 의미를 찾는가.

지금 숨 쉬고 생각하는 것이 의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의미인 것이다.


생이 외롭고 길다고, 고통스럽고 잔인하다고 스스로 그것을 중단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루하루가 고통인 누군가에겐 이 이야기조차 잔인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걱정 말자. 


죽음이라는 사건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 안식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온다.



엄마의 죽음이 두려웠던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면

https://brunch.co.kr/@chanrran/36


작가의 짧은 글이 궁금하다면

https://twitter.com/chanrran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oMpAz-DN-9I

이전 17화 척척석사 랩소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