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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의지해 수면 위에 멈추는 부동초(浮動草)

영화 <로기완>을 보고

by 고전파 Feb 09. 2025

   

           이 글은 영화 <로기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영화 <로기완>은 북한에서 연길로, 그리고 다시 벨기에로 망명한 탈북민 ‘로기완’의 삶을 그린다. 낯선 곳에서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삶이 영화 초중반을 차지한다. 의지할 곳도 없으며 돈도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난민 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한겨울을 버텨야만 한다. 기완이 선택한 곳은 유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중 화장실이었지만 자꾸만 곱아드는 발은 어쩔 수 없다. 공병을 주워 내다 팔면서 근근이 버텨 나가지만, 부랑객들과의 싸움에 휘말리고 안식처였던 화장실은 수리 중이라 갈 곳도 없어진다. 폭행과 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간 코인 세탁소에서 기완은 ‘최마리’와 엮이게 된다.      


           영화 후반부에 스스로 고백하듯 ‘최마리’의 삶은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성실하게 인생을 망칠 수 있을까에 매몰되어 있다. 전직 국가대표 사격 선수였지만, 이제는 지하 도박장에서 도박 사격의 선수로 나선다. 도박 사격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는 약에도 손을 댄 전력이 있다. 이런 내력을 살펴보았을 때 기완과 엮이게 되는 장면에서 남의 지갑에 손을 대는 일은 마리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마리의 진절머리가 나는 하루하루는 기완을 만난 이후로 바뀌게 된다. 마리가 기완에게 훔친 지갑과 돈은 마리가 빚을 진 불법 도박장 주인 씨릴에게 준 후였다. 그 지갑을 되찾기 위해 마리는 이전에는 거부하던 사격 게임에 나서는 변화를 보여준다.       




   

           어머니라는 부채의식          





           왜 이런 변화가 찾아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영화의 후반부를 살펴보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지갑 안에 피 묻은 돈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마리는 그 돈과 지갑이 기완의 어머니가 남기신 유일한 물건이라는 기완의 진술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은 마리가 자신의 인생을 고의적으로 망치기 시작한 원인이기도 하다. 병든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이 병이 아니라 안락사였다는 것을 깨닫고 느낀 배신감과 그리고 배신감으로 위장했지만 그 안에 잠재된 죄책감. 기완의 절박한 말들은 마리가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 감정들을 다시금 부추겼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공통된 경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영화 후반부에서 두 인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을 덜어내는 장면들은 인상적이다. 


           최마리는 자신을 쫓아오는 독일 마피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벨기에를 떠난다. 공항 차 안에 아버지와 단 둘이 남은 상황에서 최마리는 자신이 가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안락사의 진실을 털어놓고 두 사람은 감정적인 화해에 이른다. 


           기완 역시 벨기에를 떠나 마리에게 가는 장면에서 어머니의 환영을 본다. “너래 죽지 말고 좋은 땅에 가 살아남으라. 떳떳하게 니 이름 갖고, 사람답게, 사람답게 살라.” 라는 말을 남겼던 어머니의 환영은 마치 벨기에를 떠나려는 기완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기완은 이제야 간신히 사람답게 일하고 돈 벌며 자신의 이름으로 그 땅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물론 그 권리는 한정적인 것이어서, 벨기에를 떠나는 즉시 어렵게 얻은 난민의 지위는 상실된다. 


           그 권리가 어떻게 얻어낸 권리인가. 동료 선주의 배신으로 그 권리를 얻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완은 선주가 들고 있던 칼을 움켜쥐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육체적 고통을 압도하는 거대한 통증이 이미 내부를 장악하고 있던 탓이다. 그에 비하면 손아귀를 파고드는 날붙이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완은 끝내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니의 손을 놓는다. 이는 곧 그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모래성을 쌓는 위태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땅을 떠날 권리          






           제가 그토록 바랐던 것은 이 땅에 살 권리가 아니라 이 땅을 떠날 권리였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습니다.     



           기완이 마리를 찾아 떠나려는 장면에서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기완의 편지 중에서 가장 곱씹어볼만 한 대목은 바로 위 대사다. 이 땅을 떠날 권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포함한다. 우선 이 땅에 살 권리를 전제한다. 살 권리조차 없는 유령에게 그 땅은 떠날 권리를 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떠날 권리는 이곳을 떠나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저 이곳 저것을 방황하듯이 다니는 사람에게는 살 권리도, 떠날 권리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방랑하는 사람의 권리다.

 

           그러므로 로기완의 저 고백이 의미하는 것은 방랑하듯이, 혹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해일에 떠밀리듯이 살아온 사람이 마침내 자신이 이 다음에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확신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곳은 마리가 있는 마다가스카르다.           






           서로를 의지해 수면 위에 멈추는 부동초(浮動草)      




    

           세상을 바다에 빗대어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는 건 너무 오래된 레토릭이라 다소 지겹기까지 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된 이 비유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는 건 우리의 인생에 너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바람과 파도가 예측 불가능에 가까운 바다처럼 인생은 언제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있다.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우리 주변에 통제 가능한 수준의 것들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다루는 일뿐이다. 


           이 영화 속 주인공 마리와 기완은 사실상 주변에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들은 바다를 누비는 배가 아니라 물 위에 떠있는 연꽃 같은 부동초에 더 가까워보인다.    


           파도가 밀려오는 대로, 바람이 이끄는 대로 두서없이 흔들리고 깨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처지는 마리의 아버지의 입을 통해 정확하게 요약된다. 기완이 오해와 편견에 휩싸여 경찰서에 갇혀 있을 때 이를 빼내주는 장면에서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내 딸,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아이입니다. 옆에서 붙잡아줄 단단한 사람이 필요해요. 그쪽처럼 똑같이 위태로운 사람 말고.   

  




           제 인생을 성실히 망쳐가는 딸의 곁에 언제 어떻게 쫓겨나거나 사라질지 모르는 탈북민이 있는 모습은 아버지로서는 불안한 것이 당연하다. 이를테면, 이 장면에서 기완에게 소개해주는 변호사 같은 인물이 아버지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람의 표본처럼 보여 진다. 자신의 처지,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는 기완은 제대로 된 대답이나 항변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위태로운 상태라는 공통점은 두 사람에겐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원인이 된다.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 기완은 마리에게 마리 아버지의 말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고백한다.      




           전에 너의 아버지 너 만나지 말라 했을 적에 나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혀 대꾸도 못했는데 나 그 때 다짐했어. 너 붙잡아줄 단단한 사람 되갔다고. 나 꼭 그런 사람 돼서 너 만나러 갈 거야. 




           위태로운 상태 그 자체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게 했고, 아버지의 우려와 달리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아버지의 바람은 부정(父情)에서 기인하기도 했거니와 본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물론 마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단단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병에 걸린 후로는 어머니는 위태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람을 붙잡아야 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로서는 그 일이 기완 같은 처지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그런 아버지조차 어떤 의미에선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나아가서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마리처럼 불안정한 사람 옆을 지키며 붙잡아줄 단단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들의 시각에서 마리는 이해가 불가능한 타자에 불과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옆에서 그의 고통을 나누어 견디는 일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마리와 기완이 서로를 자신의 구원이라 여기며 사랑하게 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 둘은 거친 호수 위를 표류하다가 마침내 서로를 만나 기대고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게 된 부동초가 된다.      





           쌍방구원이라는 나의 아킬레스건          





           여기까지 오면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로기완>이 객관적으로 좋은 영화였는가를 따져보는 것인데, 그런 평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예측이 가능한 전개와 선역들만 가득한 영화는 종종 지루함을 안긴다. (씨릴을 제외하고는 악역이라고는 전무하다시피 한데, 심지어 씨릴에게 마저도 사랑 같은 집착을 부여하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영화에서 단 한 가지의 장점을 발견하게 되면 나머지 단점들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다분히 개인적으로 나는 쌍방구원 서사에 약하다. 아킬레스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진창을 헤매던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의지해 진창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그리고 설사 진창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이야기는 언제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쌍방구원의 이야기를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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