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종의 기원」
자기실현적 예언은 고대 신화에서부터 시작된 유구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 자기실현적 예언의 사례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오이디푸스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시학』)라고도 평한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의 모태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의 자식이다. 어느 날, 델포이 신전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자 라이오스 왕은 양치기에게 아이를 죽일 것을 명한다. 그러나 양치기는 차마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버리는데, 이 아이가 우연히 옆 나라 코린토스 왕의 양자가 된다.
훗날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라는 오래 전 아버지가 받았던 것과 동일한 신탁을 받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코린토스 왕의 친아들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해하지 않으려고 왕궁을 떠난다. 그 방랑길에서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만나 시비가 붙고, 친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게 된다. 훗날 테베의 왕이 되어 친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리고 얼마 뒤, 선왕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다가 자신이 행한 비극을 깨닫게 된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모두 각각 신탁의 예언을 피하고자 노력했는데, 도리어 그것이 예언을 실현하게 만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자기실현적 예언을 담은 시 한 편을 살펴보자. 할머니는 자주 하신다. 하시고 난 뒤의 할머니는 기분이 좋다고 하신다. 도대체 무엇을 하신다는 말인가. 시에서 이 행위에 대해선 충분한 설명이 없다. 몇 가지 가정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뒷부분에 나올 등목을 하신다는 표현을 미리 예비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떠올린 해석은, 그 앞에는 어떤 행위가 들어와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식사를 하신다, 독서를 하신다, 잘 준비를 하신다, 산책을 하신다, 등등. 삶을 구성하는 모든 행위를 이 짧은 시 안에 다 담을 수 없어서 시인은 차라리 생략을 해버린 것이 아닐까?
이러한 해석을 붙잡고 나아가 보자. 할머니는 그 많은 일들을 ‘하시고’ 몸을 씻으신다. 등목을 하시고, 머리를 다듬으시고, 인찬아 물 좀 끼얹어라 말씀하신다. 백 년 동안 사용해왔을, 그 무섭도록 긴 세월을 지탱해줬을 몸을 씻는다. 그건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듯이, 내일 다가올 삶을 준비하는 자세다. 오늘 하루 행했던 많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살아가겠다는 자세. 백 년이란 세월을 그런 자세로 살아오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황인찬의 시 속에서 할머니는 손자인 ‘인찬’에게 ‘망할 것’이라고 부른다. 망할 것이라는 표현을 풀어 보면, ‘너는 앞으로 망할 녀석이다.’ 쯤 되는 예언인 것이다. 그래서 시 속의 인찬은 도대체 자신이 언제쯤 망할까 궁금해 한다. 할머니의 예언이 실현되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다 세상이나 누군가가 망하기를 바라니까,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크게 놀라울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시기를 기다릴수록, 개가 태어나고 나무가 자라고 건물은 높아지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운석은 충돌하지 않는다. 세상은 망하기는커녕 더 발전해나간다.
결국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은 꿈속에서 실현된다. 인찬은 망한 세상을 꿈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 세상에서도 할머니는 하고 계신다. 깨끗이 씻고 계신다. 늙은 몸을. 여전히 망할 것이라고 하시지만, 망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고 인찬은 살아 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프로이트의 설명처럼 현실의 욕망이 꿈속에서 좌절되는 방식으로 성취된 것일까. 그러나 그보다는 조금 더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어떤 악담은 지극한 애정의 표현 방식이다. 할머니가 손자가 망하기를 바랄까? 아니다. 그건 그냥 애정을 담은 말일 뿐이다. 다만, 어린 인찬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래서 인찬은 그 예언이 곧이곧대로 실현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이 예언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럼으로써 실현된다. 할머니의 속뜻은 ‘이 망할 것아,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망하지 말고 잘 살아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잘 사는 모습을 할머니는 끊임없이 인찬에게 보여준다. 하는 것으로, 씻는 것으로. 현실에서도, 심지어 꿈 속에서도 말이다.
그러므로, 인찬이 망하지 않고 살아 있는 건, 할머니에게 들었던 자기실현적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방증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