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진, 『밤의 반만이라도』를 읽고
젊은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작업도 어느덧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읽어나가는 와중에도 리스트는 갱신되고 있다. 그래서 당초 목표에서 1/3쯤 와 있다.
이선진은 그 리스트 중 몇 안 되는 남성 작가인데,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전혀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꽤 놀랐다. 분명 남성 작가인데 『밤의 반만이라도』에 수록된 8편의 단편 소설 모두 1인칭 여성 레즈비언을 화자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작가가 1인칭 여성을 화자로 두고 소설을 쓰는 일도 많지 않은데, 레즈비언이라니. 게다가 단지 한 편이 아니라 8편 모두 그렇다는 점에서 다소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작가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기 자신과 가장 먼 존재를 화자로 삼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렇지 않아서인지 남성작가-여성화자의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선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와닿는 지점은 말장난이다. 짐작해보건대, 작가는 이러한 말장난을 좋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닐까.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말장난들은 많지만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본다.
닉네임 ‘맛있으면 짖는 개’는 짖지도 않고 잘 말했다. 내가 사람 하나 만든 셈이었다.
-「나니나기」, 50쪽.
야심차게 낸 앨범을 처참하게 죽 쑨 뒤 연휘는 진짜 죽을 쒔다.
-「나니나기」, 53쪽.
야심차게 낸 앨범을 처참하게 죽 쑨 뒤 연휘는 진짜 죽을 쒔다.
-「나니나기」, 53쪽.
그렇게 우리는 별을 보러 가지 못한 대신 서로를 벽 보듯 했다.
-「보금의 자리」, 103쪽.
더는 아무것도 죽일 게 없어서 나는 조용히 숨죽인다.
-「망종」, 135쪽.
나는 언제나 잘나기보다는 잘 나고 싶었다. 무엇을? 하고 묻는다면 나 자신을.
-「작가의 말」, 323쪽.
마음 씀씀이가 헤픈 아이들이 너를 봐줬기 때문이었다. 눈 뜨고 보기만 한 게 아니라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밤의 반만이라도」, 198쪽.
이러한 말장난은 장난답게 상황을 유쾌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그러나 불편한 상황에도 이 말장난들은 비켜서질 않는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지금 웃어야 하는 건가 울어야 하는 건가, 다소 헷갈리게 만든다. 그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이선진의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소설 속 화자들은 대체로 연인이나 가족들에게 대체로 어떤 생각을 품지만, 입 밖으론 끝내 내뱉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이와 같은 장면은 자주 포착되는데, 이건 어쩌면 화자들이 가진 성정체성에 기인하는 근본적인 성향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내뱉지 못하는 건 주로 화자의 진심에 속한 말들이다. 대체로 자신과 연인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다. (물론, 「보금의 자리」에서처럼 홧김에 진심을 내뱉기도 한다.)
연인은 일종의 구두 계약일 뿐 법적으로 확인받을 순 없다. 예외는 존재하지만, 그건 사실혼 같이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이선진의 소설 속 설정처럼 동성 연인들의 경우라면, 일반적인 이성 연인들보다 더 난감한 감정선 위에서 관계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계에 대한 의심과 의문이 한데 어우러질 때,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와 관계의 존재를 ‘부존재’로 확인한다.
「망종」에서 한아는 할머니의 애인 우매 씨의 집 앞에서 ‘거기 계셔요?’라고 묻고 우매 씨는 ‘여기 사람 안 살아!’ 외친다. (121쪽.)
「무관한 겨울」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영문은 가벽을 두드리고, 인영은 그 소리를 듣고 ‘여기 없다.’라고 말한다. ‘없음을 말하면서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158쪽.) 또한 병원의 화장실에서도 영문은 옆 칸의 인영에게 거기 있냐고 묻고, 인영은 ‘여기 없다’고 답한다. (174쪽.)
인영의 말처럼 없음을 말하면서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역설. 이건 앞서 언급한 이선진 특유의 말장난의 계보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다른 지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단순한 ‘존재와 부존재의 대립’이 아니라 ‘존재-부존재가 이루는 한 쌍’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을 때 조금 더 힘을 얻는다.
그저 살아 있음에서 살아 없음의 상태로,
-「생사람들」, 271쪽.
‘살아 없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 있다.’는 말의 한 쌍으로써는 존재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말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존재와 부존재를 끈질기게 한 쌍으로 묶는다. 이러한 흔적이 드러나는 이 소설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밤의 반만이라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수 씨가 너, 다운이를 낳게 된 경위다. 미수 씨는 전맹 시각 장애인인데, 자신의 임신 테스트기의 결과조차 볼 수 없다. 그래서 공원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테스트기의 줄이 몇 개인지를 묻는데, 아이는 한 개라고 답한다. 미수 씨는 자신의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이는 왜인지 거짓을 말한 것이었고, 미수 씨는 다운을 낳았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아이의 존재. 한 줄의 존재는 사실 한 줄의 부존재였고, 두 줄의 부존재는 두 줄의 존재였던 것이다. 이처럼 존재와 부존재는 대립하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엮여져 있다. 요컨대, 이 소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물고 이어지는 것처럼.
이 소설에선 독특하면서도 재밌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름조차 특이한 경우도 있는데, 우매 씨, 주옥 씨, 미소, 소미 쌍둥이는 유별난 이름만큼이나 성격도 유별나 쉽게 각인된다. 또한 작가는 소설을 일종의 유기체로 만드는데 탁월하다. 「보금의 자리」에서 화자가 유령에게 한 방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유령은 투시를 할 수 있어서 그 방의 내부를 다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방 안에는 유령이 화자에게 주고 싶었지만 줄 수 없었던 토분이 들어 있던 것. 이러한 세심한 설정은 서사 속에 녹아들어 소설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군데 군데 ‘별의 순간’ 같은 부분들을 포착할 수 있지만, 8편의 화자 성격들이 대체로 유사하다. 읽는 내내 긴 연작소설이나 하나의 장편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금의 자리」나 「밤의 반만이라도」는 굉장히 인상적인 소설이었고, 작가의 다음 작품을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될만큼 좋았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을 남긴다. 내가 비밀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유사해 인상 깊었다.
이건 비밀인데, 그 당시 나는 몹시 들키고 싶었다. 뭘 들키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저 들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충만했다. 어쩌면 그날도 너에게 내 마음을 들켰는지도 몰랐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금을 침범한 네 손끝이 내게 닿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필요조건이 누군가를 처음 본 순간이 아니라, 눈을 감아도 누군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밤의 반만이라도」, 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