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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요일 Oct 01. 2023

잠(JAM)17

장편소설

17.스키조


- 끄응… 어쩔 생각이에요?


엘리가 묶인 손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자 포기하고 말했다. 관리자는 와인 잔을 들어 엘리에게 건배하듯 제스처를 하고 한 모금 마셨다. 뭐라고 할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까. 엘리는 도대체 왜 자기가 볼모가 되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름 신연방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늘 그 자리에서 빛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멘탈까지 탈탈 털려가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었다. 언니. 100년의 잠을 흘러온 지금, 언니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연방 대학을 마치면 몇 년간 커뮤니티에 내려가 의무 근로를 한다. 그걸 끝내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초우주 기업에 스카우트되어 돈도 벌고 언니와 행복하게 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타의에 의해 나이만 먹고 말았다. 지금이 몇 년이에요? 엘리의 말에 관리자가 안 세어봐서 모르겠는걸. 요즘은 도통 시간 가는 걸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 그들도 모두 죽일 셈인가요?

-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을 텐데?

- 그거야 우리도 뭐 다를 바는 없지 않나요?


관리자가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사악한 기운이 가득 느껴져 엘리를 섬뜩하게 만들어야 정상인데 그의 눈은 전과 다를 바 없이 악한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 그들만이 아닙니다.

- 그럼 또 누굴 죽일 건데요?

- 우물에 끼어있는 먼지를 남김없이 씻어낼 생각입니다.

- 터무니없어.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런 짓을. 옛 지구 좋아하시니 잘 알겠지만 여긴 그 세 배나 되는 별이라고요. 게다가 여기 사는 생명체들은 그 수가 무려…

- 상관없어요.


네? 말이 막힌 엘리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라고 중얼거릴 때 관리자의 말이 이어졌다.


- 우리 직원이 그 우물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성냥이었어요.

- 성냥?

- 직원은 늘 자기의 성냥과 어머니의 우물에 대해서, 불꽃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온갖 곤충들이 밤을 지새우며 짝을 찾는 이야기,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먹이를 유혹하는 나비와 바람에 자식들을 날려 번식을 꿈꾸는 나무들, 어머니는 새처럼 날아 은하계를 떠돌며 따뜻한 우물에서 자는 걸 바랐대요. 침대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 새가 우물을 나와 아침을 먹어요….

- 그곳이 어디예요?

- 여기서 멀지 않은 곳, 우물 공사가 진행 중이던 어느 경로의 은하, 황금빛 뿔이 찬란하게 빛나던 NJ24825. 그 아름다운 워프 터널이 어느 날 들이닥친 나비들에 의해 성냥이 되어 사라졌답니다.

- 워프 터널 공사는 100년 아니지 200년도 더 된 일인데 어떻게 가능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소(설을 쓰지)…

- 그게 시작이었어요. 헐떡거리는 주전자를 아끼려고 나비들은 우물 공사 예정 경로에 존재하는 성냥들을 소멸시키고 다녔어요. 새들이 날아올라도 받아줄 우물은 없어요. 물론 그 먼 성냥은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만.

- 뭐래

- 바다를 건너는 터널을 만들려면 몇백 배의 주전자를 끓여야 해요. 아마 그들은 그 불씨를 전부 받아내 다른 색종이를 만들고 모든 일을 플랑크톤 수프에 떠넘긴 거 아니겠어요. 의원들이 뭘 알아요. 틀어박혀 문 앞의 일도 관심 없는 나비들. 이건 워프 터널 공사를 맡은 기업 연합에서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지. 나비의 욕심이 만든 비극…

- 그럼 그놈들만 찾아서 죽이면 되지. 왜 전부…

- 나비가 저지른 짓이니 성냥이 갚아야지.


그 말을 하는 관리자의 옆모습은 이상해 보였다. 어두웠다가 평온했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감정의 기복이 말을 하면 할수록 크게 바뀐다. 엘리가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비슷한 성향의 언어 구사를 검색했다. 순식간에 몇 가지 유형이 떠올랐다.


아침 해가 뜨면 우리는 잠에서 깨요. 그러면 깨진 병으로 머리를 쳐요. 머리가 수박이 되는데 수박이 맛있는 거예요. 수박에는 우리가 모르는 성분이 있어요. 그 성분이 우리를 울게 만들어요. 울음이 그치질 않아요. 세상은 아무도 없는 사막. 물이 필요해. 목이 말라요. 누가 나에게 수박 좀 줘요…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스키조 증상과 비슷했다. 오래전에 인간에게서 극복된 정신과적 증상인데 관리자에게 나타난 것이다.


- 그 나비, 아니 그 성냥은 어떻게 탈출했어요?(헷갈려라…)

- 그 나비의 어머니는 말벌이었어요. 훈련 과정으로 우물에서 잠시 나와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물이 사라진 걸 알았다고 해요. 처음엔 엉뚱한 우물에 도착한 줄 알고 당황했는데 세 번 네 번 성냥을 태우고 다시 돌아와도 늘 그 자리였대. 사막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거지.

- 그럼 어머니가 직원을 구한 건가요?

- 작은 벌이었던 어머니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우물에 갈 말벌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도 살아야지, 최대한 숨을 참고 가보자는 마음에 아가미를 뻐끔대며 보름을 떠돌았답니다. 남은 성냥은 몇 개뿐. 아껴 먹어도 7일 만에 먹이가 떨어지고 나비는 우주를 떠도는 돌멩이처럼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 막막한 우주를 헤매다가 마침내 비가 내리기 직전 지나가던 화물선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답니다. 그들은 신연방 나비들이었고 성냥의 말벌은 지구로 오게 되었죠. 지구인과 결혼해서 고양이를 낳게 되고. 잔나비는 월급이나 파먹는 루팡이 되어 땅굴에 살아요. 땅굴엔 해가 뜨고 비가 내리면 우물에서 나비가 날아올라요.

- 아…


분명 스키조가 맞다. 신연방의 모든 생명체를 멸살하려는 걸까. 관리자의 망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정말 스키조 환자라서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


- 그래도 엄마를 구한 건 나비, 아니 신연방 소속인데…


엘리가 미련이 남아 어떻게든 관리자를 설득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콘트롤 데크로 들어왔다. 어? 누가? 관리자가 얼른 일어나 엘리의 속박을 풀었다. 속박이 풀린 엘리가 손목을 주무를 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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