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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Jan 08. 2020

4. 약을 바꿔 보았거든

약이 너무 독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자정이 되기 전에 약을 먹습니다. 보통은 열한시 즈음. 잠들기 전에 먹는 약이지만 조금 이른 시간에 먹습니다. 바꾼 약이 독하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그리고 깊게 잠들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둔하고 어지럽습니다. 머리가 몽롱해서 다시 침대에 길게 누워 잠들어 버립니다. 혹은 둥글게 몸을 말고. 처음에는 오전 열 시에 정신이 들었는데, 이제는 오후 네 시까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세계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잠들어 있고 싶습니다.




비가 내렸어.


종일 우울했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짓눌리는 기분은 이제 익숙하고 묘사하기도 질려. 해가 떠도 날이 밝지 않았고 영원한 밤인 세계에서 나는 홀로 깨어나 있는 기분이야. 조명을 아무리 밝게 해도 어둠은 걷히지 않고 이 고요한 곳에서 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시간을 버리고 있지. 모든 것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나를 채찍질하는 목소리가. 내가 일어나 달리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들려. 그렇지만 부러진 다리로 달릴 수는 없어. 일어나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해. 일어서기부터 연습해야 해. 나는 일어설 수도 없어서 바닥을 기면서 달리려 했어. 그게 얼마나 추한 모습인지 알지도 못하고. 누가 보았을까, 그런 내 모습. 네 발로 어설프게 기어가는 모습.


무거운 머리는 눅눅하게 젖은 것처럼 하염없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이야. 당신은 분명 슬퍼하겠지. 아니, 슬프지 않을지도 몰라. 당신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그건 네 인생이니까, 라고 대답하겠지. 아득한 미래를 상상하면 언제나 겁이 나. 모든 것이 변하고 있거든. 하루하루 변하고 달라지고 있지. 자꾸 달라지는 것들에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 적응할라 치면 다시 한 번 변하고 뒤틀리는 세계를 나는 알고 있어. 간신히 한 발자국을 내딛었는데, 또 코스가 바뀌었어.


나는 우울하고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


아직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몽롱함 속에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자꾸 머리가 어지러워. 갈피 없이 흔들려. 사랑하는 당신, 내 상태를 당신이 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 당신이 보고 나 대신 판단을 내려 줘. 나는 무언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허튼 생각을 하고 헛짓을 해. 이상한 것들만 하려고 하는 게 내가 정말로 이상한 탓인지 혹은 이상한 환경에 놓여 있는 탓인지 파악해 줘.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정말로 나를 사랑해? 나는 가끔 묻고 싶고 항상 대답을 알고 있어.


시를 쓰고 싶어. 정말 하염없이 울고 싶어.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어떤 무덤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어. 샛파란 피를 흘리고 싶어. 눈물처럼 울고 싶어. 바꾼 약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도 모르겠어. 당신이 나를 봐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진단을 내려 주면 좋겠어. 어쩌면 당신은 의사보다 더 나은 진단을 내려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오래 봐 온 사람이잖아.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어.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정말 나였을까?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한 나였을까?


그래도 한동안 쓰지 못하던 글을 오늘은 쓸 수 있었어.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어.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당신은 알고 있지. 내가 모든 것을 놓고 달아나려 했던 그 때. 모든 것을 다 필요 없다고 싫다고 투정 부리고 떼를 쓰며 다 놓아버리고 그래, 버리고 달아나려 했던 그 때를 당신은 기억하고 있지. 그 때처럼 나는 다시 한 번 겨울의 우울에 잠겨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 그래도 오늘은 글을 쓸 수 있었어. 한 걸음을 내딛는 거야. 재활 치료처럼. 나는 보고 듣고 읽고 말하는 연습을 다시 하고 있어. 한 글자 한 글자를 다시 한 번 새기고 있어. 어쩌면 나는 또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지만. 나는 달라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도 변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 나 혼자서만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돌처럼 굳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 나를 당신은 좋아하지 않겠지만. 사랑하지 않겠지만. 죽은 나는 변하지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지만.


스물 여덟의 첫 번째 달이 왔고 나는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첫 주가 지나가고 있어.


열 두 개의 달이 지나가면 나는 없어질까?


사랑하는 당신, 몇 개의 달을 나는 볼 수 있을까. 뜨고 지는 달, 차오르고 기우는 달. 그런 달들을 올려다보며 나는 또 몇 개의 날들을 헤아릴까. 시를 쓰고 싶은 밤이야.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 밤이야. 무엇이든 하염없이 적어 내려가고 싶은 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썼어.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치유하고 있어. 글을 쓰고 있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기분이야.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얀 화면 위에 까만 글씨를 새기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알까.


첫 번째 달이 끝나갈 때 다시 한 번 정리된 나를 볼 수 있을까.


사랑하는 당신. 차마 연락할 수 없는 당신. 닿을 수 없는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그립고도 진절머리 나는 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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