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만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지금 나는 자유의 몸이다. 누구의 눈치도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나 자신에 몰두할 수 있는 해방의 시간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언제든 이런 홀가분함이 무료함이나 지루함으로 홀라당 바뀔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여 훗날 몸과 마음이 지쳐 충전이 필요할 때 지금을 언제든 꺼내보며 위로받을 수 있도록 행복의 순간들을 기록해보려 한다.
지금 나에게 가장 좋은 건 뭐니 뭐니 해도 입시로부터의 해방이다. 나에게 입시란 한번도 쉬운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작년 수능일은 내 평생 처음으로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목요일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부터 도시락을 쌀 일도 없고 어두컴컴한 골목길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으며 하루종일 각종 학부모 카페를 들락거릴 필요도 없는 말 그대로 아주 보통의 하루였던 것이다.
수능이 끝나면 쏟아지는 각종 학원의 폭풍문자들. 미리 예약을 걸어둔 면접, 논술수업 참석확인문자들이 도착하고 뒤이어 정시컨설팅 예약을 독촉하는 문자와 수능설명회 예약문자까지 정신이 없다. 아직 정시발표도 나기 전인 1월부터 재수학원 조기반 문자도 착실히 보내준다. 재수생 할인을 내세운 각종 인강패스에 일타강사의 수업안내문자까지 휘몰아친다. 내 인생 가장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던 나의 동반자, 이토록 친밀한 학원들이라니.
이제 나는 정든 학원들에게 안녕을 고하며 수신차단버튼을 가차없이 누른다. 그 쾌감과 후련함을 무엇에 비할까. 나에게 진정한 해방이나 다름없다.
둘째 사교육비로부터의 해방이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인강을 좋아해 현강비가 많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원에 교재에 스카나 독서실비까지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자식이 공부한다는데 돈이 아깝겠느냐만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풀지 않은 새 교재를 볼 때마다 속이 쓰라려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예체능에 소질이 없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웃픈 농담이 있을 정도로 교육비의 무게감은 결코 작지 않다.
사교육비는 이제 대학생으로의 신분세탁을 위한 품위유지비로 탈바꿈해 여전히 내손을 스쳐 지나가고 있지만 돈 쓰는 티라도 나니 다행이라 여기며 혹시 몰라 개설한 마통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만세만세 만만세다.
셋째 관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전업주부였던 나에게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 모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관계는 아이친구 엄마들과의 모임이었다. 새 학년의 시작과 함께 매년 자동생성되는 반모임은 정보탐색의 숨막히는 장. 미스코리아 뺨치는 어색한 미소를 장착하고 적당히 말을 아끼며 눈치껏 예의를 갖추다 돌아오면 나의 기는 다 빨려나가 찾을 길이 없다. 하나를 받으려면 하나를 주어야만 하는 철저한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한 경쟁과 질투가 스며든 사이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 내 곁엔 나만을 위한 소수정예 요원들이 남아있다. 나의 경조사를 아낌없이 말할 수 있는 존재들이 옆에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시기나 질투없는 순수한 축하와 진심으로 건네주는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가족의 흉도 속상한 마음도 온전히 내보일 수 있는 관계는 그 자체로 힐링이다.
마지막은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지금껏 나는 나 자신을 내가 정한 틀속에 스스로 가두고 살아왔다.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1인다역의 삶을 살며 본캐는 외면한 채 부캐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내가 컨트롤하는 온전한 나의 삶이 아니라 나를 쪼개 주위의 삶에 나눠주며 살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거 같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았던 것이 아닐까.
이제 내가 주인공이 되어 주변을 살피고 나를 돌보며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아이들과 집안대소사로 가득 찼던 다이어리에 내 삶의 일정을 빼곡히 채우며 열심히 새해를 살아봐야겠다.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에피크테토스)
사자 아이들을 키우시며 이것들이 언제 인간 되나 한탄하시는 많은 어머님들께 기쁜 소식 들려드려요. 입시가 끝나면 기적이 일어나는데요, 바로바로 우리 아이들이 멀쩡한 사람이 되는 거랍니다. 곰만 사람이 되는 게 아니더라구요.
물론 스스로 마늘만 먹으며 단 백일만에 사람이 된 기특한 곰을 상상하셔서는 안 돼요. 일단 이것저것 온갖 수발에 엄빠의 혼을 갈아 넣어드려야 하구요. 최소 수년간은 허벅지를 꾹꾹 찌르며 사리를 대량생산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인내하셔야 해요.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 나면 어느 순간 철이 번쩍 든 사람으로 변신한 우리 아이들을 만나실 수 있을 거에요. 엄마가 잔소리를 해도 미소를 짓구요, 스스로 방정리를 할 때도 있어요. 데이트를 하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사 와 무심히 건네주기도 하지요. 또 부모에게 조언도 해주고요, 모르는 걸 가르쳐주기도 해요. 키도 몸도 마음도 지식도 훌쩍 커버려 더 이상 부모의 품 안에 가둬둘 수 없는 낯선 향기 풀풀 나는 어른이 되어버리는 우리 아이들. 곧 개봉박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