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冥想)은 무엇인가? 눈을 감고 특정한 대상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적으로 풀면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상상하면서 고요히 침잠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묵상한다. 불교도인들은 부처를 상상하면서 염불을 외운다. 꼭 무엇인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하는 명상인 지버리쉬(Gibberish)도 있다. 참선은 우리들을 침묵 속에서 새로운 우주로 인도한다.
지버리쉬는 방언기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는 것이 지버리쉬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외치는 것이 방언기도이다. 방언에 대한 해석의 은사도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인연이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달란트이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달란트는 아닐 것이다.
명상은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고대부터 존재해 온 활동이다. 명상을 통해 인간은 지금 처해있는 환경을 초월하여 새롭고도 온전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삼매라고 한다. 삼매를 체험하게 되면 명상이 왜 좋은지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얻게 되고, 현실적인 세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큰 기쁨, 열락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바르게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등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삼매가 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잘 될 때는 잘 찾아오지만, 어쩔 때는 전혀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삼매가 찾아오던 찾아오지 않던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삼매가 찾아올 때만을 기다려 수행한다면 우리의 수행은 더 깊어질 수 없고, 온전해질 수 없다. 그런 건 반쪽짜리 수행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들어 율법, 십계명, 황금률, 계율 등으로 부르는데, 우리가 그것을 지키는 이유는 지키는 만큼 세상이 전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믿음이 없이 문자적으로 지키는 수행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수행이다.
어떤 행위를 하던 우리가 주의 깊고 세심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명상에 가깝다. 장인들의 정교한 작업도 명상이 될 수 있다. 그가 고요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면 말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는 모터사이클을 수리할 때 음악을 듣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음악을 들음으로써 마음은 즐거울지 몰라도 순수한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순수한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도 명상이다. 그 순간에 음악이나 다른 어떤 것을 첨가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첨가제가 없이 만든 순수한 음식처럼 말이다.
사실 일상에서 명상인 것과 명상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하나다. 그때 그 순간에 깨어있었는가, 아니면 잠들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깨어있는 마음은 주의 깊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만, 잠들어 있는 마음은 혼몽한 상태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 사람이 괴물이 되는 이유는 깨어있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혼돈스러운 마음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면서 생긴다고 본다. 혼돈을 일으키는 꿈속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꿈에서 깨어나야 진실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 수가 있다. 물론 저항이 있을 것이다. 어떤 변화든 저항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계율,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이러한 저항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성경에도 '마음을 잘 지키라. 거기로부터 생명의 물이 나온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몸과 마찬가지로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여러분 자신이 마음의 수호자이며 마음의 양육자이다. 마음의 힘은 명상과 같은 활동을 통해 깊어지고 강해지며, 소신을 지닌 행동을 통해서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여러분이 순수히 믿는 바를 관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바른 길로 마음을 인도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인도한 마음은 여러분에게 빛을 비춰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