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가 떠나기 전까지 나는 슬퍼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다. 아니, 그런 모습을 엄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찾을 수도 읽을 수도 없을 글을 쓰는 것만이 유일한 방편이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더욱 깊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파도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고 숨을 쉬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곤 했다. 익사 직전에 움켜쥔 지푸라기였다. 고통에 찬 비명이었는지도 어쩌면 고해성사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처럼 가라앉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글이 그이에게 실낱같은 끈이 되기를 바랐다. 여기 나 같은 이도 있으니 당신도 버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글을 다 쓰고 나면, 여전히 파도가 몰아치는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순간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따금 농담을 하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2.
엄마가 떠나고 이제 내가 파도에 얹혀 휩쓸려 다니는 지푸라기가 되었다. 한없이 무의미하고 한없이 가벼운 존재. 이리 쓸려가든 저리 쓸려가든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 엄마가 떠나고 두 달째 되던 엄마의 생일을 맞고 알았다. 무감각하게 이리저리 쓸려다니다가 투둑 눈물이 떨어지면 슬픔이 감당할 수없이 밀려들었다. 엄마는 떠나며 나의 슬픔의 문을 열어주었다. 더는 엄마 앞에서 괜찮다고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목놓아 울었고 무너져 내렸고 무기력하게 떠다니고 있었음을 알았다.
3.
하지만.
나는 살아 있었다. 엄마 없이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다시금 올리버 색스와 빌 헤이스를 떠올렸다.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도 그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로서의 그리고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동반자로서의- 이야기가 지금의 나에게는 유일한 위안이 된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2015.1.15
...
일요일 밤, 저녁을 지어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올리버가 작은 메모장과 만년필을 손에 잡았다. 메모장 상단에 “슬프고 총격적이고 두려운 것은 맞다”라고 쓰면서 단어마다 밑줄을 그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하지만”은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말이라면서 어원학적으로 동전 뒤집기 같은 낱말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떤 주장이나 주제의 양면을 모두 고려하게 해주는 낱말일 뿐 아니라, 수줍음과 우유부단함 못지않게 자신의 성격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매사에 밝은 쪽으로 생각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그 아래에는 희망적이어야 할, 그러니까 지독히도 운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합리적일 바로 그 순간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 여덟 하고도 반 개의 근거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편한 죽음
시간-인생을 ‘완결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빌리 등)
책 출간(드디어 나 자신을 공개하는)
더 많은 보람된 일
허락된 쾌락 (6-A) MJ대마, 이제 합법
현재로서 가능한 최고의 의료진, 최고의 치료 등
정신과적 도움
나는 목이 메었다. 올리버가, 그리고 올리버와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종이 위에 올리버의 언어로 너무도 실감 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올리버가 자신의 생각을 그토록 침착하고 솔직하고 막힘없는 언어로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느껴졌다. 침울함에 가까운 나와는 달리 올리버는 기질적으로 씩씩한 사람인데, 이렇게 목록으로 작성한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배열하고 체계화한다는 것이 올리버가 사랑하는 주기율표와 다르지 않아, 그런 올리버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 나는 이 목록을 잘 간직해두었다. 이 여덟 하고 반 개 항목이 앞으로 남은 몇 개월 그를 (그리고 나를) 이끌어줄 지침이므로. 이 목록은 마찬가지로 그날 저녁식사 대화 때 탄생한 그의 에세이 <나의 생애>의 기본 청사진이 되기도 했다.
<인섬니악시티>, 빌 헤이스
4.
하지만, 이라고 적는 올리버 색스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가 적었던 지독히 운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합리적일 순간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 근거를 적어 내려 가는 그를 그려본다. 나도 역시 그렇게 적어본다.
하지만,
* 엄마가 더는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
* 현재까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치료로 마무리한 것
* 가족 모두가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것
* 갑작스러운 죽음과 달리 상대적으로 길게 준비할 수 있었던 시간
* 그 시간 동안 엄마와 함께 쌓을 수 있었던 추억과 유대감은 내 안에 남아있다는 것
* 다른 무엇보다 엄마와의 시간을 택했고 엄마가 나로 인해 기뻐한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
*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날 걱정하고 격려하던 엄마의 여리고도 순수한 애정이 내 기억 속에 있다는 것
*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다 좋다고 원하는 대로 살라고 했던 엄마의 말 역시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들처럼 나의 목록을 소중히 간직하기로 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 목록이 나의 지푸라기가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