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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04. 2019

[D+226] 이사, 퇴사, 독방생활 그리고 여행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한 채로 시간은 어느덧 두어 달이 흘렀다. 때때로 나에게 글 쓰는 일이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꾸미는 어떤 일처럼 느껴지곤 하였는데, 종종 무기력함에 빠지거나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을 때면 도무지 노트북 앞에 앉아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홀로 글 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글은 때때로 나에게 취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달까.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이사와 퇴사를 동시에 감행하며, 백수 주제에 조금은 무리하여 온전한 내 공간을 마련하였다.


즐거웠지만 몸은 정말이지 고되고 힘들었던 피노키오 식당과 바로 앞 공원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이스트레이크를 떠나 생전 처음 들어본 로즈빌로 이사 온 것은 오로지 '독방'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취를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서 가족이 아닌 이들과 생활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늦은 밤 괜스레 잠들기 아쉬울 때마다 홀로 거실에 나와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마다 온전한 내 공간을 갖고 싶다는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사와 별개로 정들었던 식당을 떠난 이유는 순전히 이대로 더 일하다간 내 손목이 온전치 않을 것 같았고, 호주에 와서 한식당에서만 일할 수 없다는 어떤 의무감에서였다.

인스펙션을 위해 가게 된 작은 역
새로운 우리 동네 Roseville
첫 독방생활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전에 살던 집보다 주 50불이나 더 내야 하는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는, 혼자 있고 싶은 갈망과 책상이 주는 안락함이었다. 내 방은 고사하고 책상조차 없는 곳에서 살자 책을 읽거나, 다이어리를 정리하거나,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던 것들을 몹시 그리워했다. 정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독립적인 이 집의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옛날 집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혼자만의 시간도 절실히 필요한 사람인지라 이사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호주로 온 뒤 처음으로 느껴보는 지독한 고독함과 편안한 고요함 사이에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나는 멜버른으로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 이상 한식당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오지잡을 잡기 위해 2시간 동안 레주메를 돌리고 다녔는데, 이렇다한들 나에게 기회가 올지도 의문이었고 최후의 보류라고 생각하고 레주메를 놓고 간 한식당에서는 시급 14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나는 인터뷰에서 그 시급을 듣자 더 이상 한식당에서 그 처우를 견디며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참 무심한 딸이구나 싶어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고 오랜만에 듣는 아빠 목소리에 그만 길거리에서 울어버렸다. 나는 가족보단 친구가 더 보고 싶던 매정하고 과년한 딸자식이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어도 한 번 즈음은 터닝포인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저지른 여행을 떠나기 전 날 밤, 시드니에 살고 있는 Y언니와 통화를 했다. 언니는 내가 SNS에 올린 글에 꽤 걱정이 되었는지 굳이 워킹홀리데이에 성공과 실패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또 다른 친구 S는 멜버른에서 바로 한국으로 날아와 같이 곱창을 먹자며 마치 내가 어디 지방에 사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멜버른으로 출발하는 오늘, 나는 꽤 새로운 기분으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공항에 도착하여 어서 비행기가 이륙하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노동과 일상으로 점철된 노동자가 아닌 이제 막 새로운 도시로 떠날 여행자처럼. 비록 이 설레임 뒤에 일자리를 알아보고 계산기를 두드려야만 하는 생활자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철저히 나를 외롭게 만들었던 이 곳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생전 처음 가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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