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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07. 2019

[D+259] Bondi Beach / 취업 잔혹사

비자 만료일 100일 전 길을 잃다

어느덧 비자 만료일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벌써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며 놀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고작 100일밖에 안 남았다며 시간이 흐른 것을 실감하다니. 시드니에서 반년을 보냈다는 사실에 놀라 그날부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며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잔뜩 끄적이고 나서 3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사실 이곳에서 더 체류하느냐 마느냐 갈등 중인 탓에 비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퍽 현실감 없이 다가온다.


워킹홀리데이의 반을 보낸 식당에서 그만둔 후, 나는 적잖은 방황에 놓였다. 여행에서 돌아와 2주 안으로 일자리를 잡겠노라 다짐하였는데 그 후부터 한 달가량 일터를 세 번이나 바꾸는 반 백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간 어떻게 보냈냐고 하면. 카페에서 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인근 쇼핑센터 안에 작은 커피숍에 취직하였다가 커피를 배울 수 있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곳에서는 설거지로만 시간을 보낼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부매니저가 여간 불편하였으며 우아하게 사람을 갈구는 능력을 지닌 사모님과는 도무지 웃으며 일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로는 집에서 꽤 먼 카페에 취직하였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여 새벽 6시에 도착해 단 5분도 쉬지 못하는 근무환경에 기겁하였고 심지어는 평상시에는 그토록 좋으시던 분이 바빠질 때마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시는 통에 도무지 그곳에서 오래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결국 고작 5일을 채우고 나온 나는 동시에 합격하였던 오픈 예정인 레스토랑에 당장 다음 날인 28일부터 근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중간에 테이커 웨이 일식당에서도 하루 일하였는데, 면접 때 듣던 것과는 다른 근무 포지션과 주 60시간에 육박하는 노동시간을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아, 죄송하다는 장문의 문자를 남기곤 퇴사 의사를 밝혔다. (이후로 나는 그 카페에서 앞전 일보다 더한 정신노동을 겪었다.)


사실 말하자면, 이곳으로 나는 노동만을 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적어도 최소한의 휴식은 보장되어야 했다. 게다가 아무리 주 5일이었다 할지라도, 전 날 12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나면 다음날 외출할 체력이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단란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이틀 가량의 시간이 남은 나는 하루는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은 채 게임을 하고 글을 쓰는 올드보이 생활을 하였다가 도무지 이대로는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 없어, 출근 전 하루 남은 휴가를 알차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간 곳이 시드니에서 그렇게 유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정작 반년을 넘게 살며 가보지 않은 본다이 비치인 것이다.

열두 시까지 늦잠을 잔 후, 채비를 마치고 바다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맛집을 찾아 검색하였는데 수요미식회에 소개되었다던 펍을 발견하였다.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찾다 보니 어느새 도착하였고 버스에서 막 내리자마자 모래 반, 사람 반으로 가득한 해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간 내가 갔던 조용한 해변들과는 다르게 이곳은 철저히 관광지스러웠고 무엇보다 혼자 온 사람은 없던 터라 첫인상은 흡사 한국의 해변가와도 비슷하였다. 다소 사람이 적은 쪽으로 걷자, 널찍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곳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바람에 쉴 새 없이 흩날리던 원피스 자락을 부여잡고 바위를 건너기로 시도하다가 이내 물에 빠질 것이 걱정되어 어린아이들이 뛰어넘는 바위 근처에만 가본 채 다시 해변으로 돌아왔다.

본다이 비치 맛집 'Bucket List'

그리곤 이동 중에 검색해본 버킷리스트에 도착하였는데, 식당이라기보다는 펍에 가까운 그곳은 가게를 울릴만한 큰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로 정신이 없었고 그런 연유로 다소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던 나는 가게 주위를 잠시 돌아보다가 이내 용기를 내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바에서 코로나 한 병과 피시엔 칩스를 주문한 후 바다가 보이는 곳에 운 좋게 자리를 잡은 나는 음식이 나오고, 갓 튀겨진 피시엔 칩스를 맛보자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입안에서 생선 살이 사르륵 녹는 것이, 전에 맛보았던 다른 튀김들보다도 훨씬 부드러웠달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생선 살이 바스러지는 것이 아닌 녹는 것에 가까웠다.


이곳에서 친동생과 다름없는 지안이에게 실시간으로 나의 여행기를 전달 후, SNS에 내가 이만큼 혼자서도 잘 놀고 있다는 것을 광고한 뒤 한참을 바다를 보다가 가게를 빠져나왔다. ‘버킷리스트’는 사실 가게 내부보다도 외부에서 더욱 사람들이 바글거렸는데 신기한 것은 그곳에서 나처럼 혼자 온 동양 여자애는 찾아볼 수 없더라는 것이다. 번화가 한복판에서도 ‘헐 대박’등의 감탄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시드니에서 이러한 경험은 처음인지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Bondi Icebergs Pool
Bondi to Bronte Coastal Walk 입구

그 후 선글라스 등을 파는 노점상들을 구경하다가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나는 이내 네이버가 아닌 구글맵에서 행선지를 찾기로 했다. 종종 나는 여행지에서 구글 지도에 표시되어있는 카메라 아이콘을 주의 깊게 보곤 하였는데, 아이콘이 표시된 곳들은 유명하거나 혹은 유명하지 않더라도 그 근처를 여행 중 한번 즈음 들려도 후회 없을 만큼 좋은 곳들이었다. 그렇게 해안산책로인 Coastal Walk를 찾아 길을 걸었고, 그곳으로 가던 중 나는 본다이 비치가 왜 유명 해졌는가에 대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Coastal Walk로 가는 중에 본다이 파크 앞으로 해변이 펼쳐져 있는데 바다 앞 언덕이라는 이색적인 풍경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대개 공원 안에 높은 언덕 밑으로는 그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는데 전경 대신 푸른 바다가 보이니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였고, 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보다 선선한 바람과 풀냄새를 맡으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편이 본다이 비치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이로워 보였다. 어느덧 어두워지는 하늘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다이 아이스버그스 수영장을 지나 브론테 비치로 향하는 Coastal Walk의 초입까지 걸어갔는데, 그곳은 시드니를 떠나기 전 운동화를 챙겨 신고 날이 좋은 날 꼭 다시 오리라며 다짐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처럼 시간이 부족하여 발걸음을 돌릴지라도 ‘다시 찾아와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 온통 해변으로 가득한 시드니에서 여행으로 왔다면 이처럼 아쉬운 순간에 다시 시간을 내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종종 이곳에서 내가 무얼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여행을 하고 나면 그 순간만큼은 관광객이라는 생각에 힘든 노동도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사실 관광 외에도 영어를 주목적으로 삼은지라 조건이 좋았던 일식당을 하루 만에 때려치우고 새로 오픈한 카페에 일하기로 결정한 것 역시 영어를 쓸 수 있는 근무환경 때문이었다. 영어 인터뷰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하기도 하였고, 새로 오픈하는 곳이니 만큼 적어도 직원들 간의 텃세 역시 없을 것 같았으며 무엇보다 웨이트리스와 주방 가운데에 있으면서 홀에서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이 만족스러웠다. 물론, 반년 동안 주방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양파 하나 제대로 썰지 못하는 실력과 생존 영어에 더욱 치중되어있는 나의 영어실력을 매니저가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 무척이나 염려스럽지만.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이 카페는 내가 거쳐간 일터 중 가장 최악으로 남았다.)


앞으로 남은 100일 동안 여행자금을 생각하며 지내다 보면 적어도 뒤돌아 봤을 때 큰 아쉬움은 없지 않을까. 우습게도 나는 일상에 지치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여행 한 번에 금세 마음이 충만해져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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