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질 권리마저 허용되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 여행기. (56)

by Chris
그림: 절규(The Scream) by Edvard Munch, 1893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전날 저녁 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졌다. 영화를 핑계로 그의 얼굴을 보자고 하니 처음에는 별로 재미없는 영화 아니냐고 내게 핀잔을 주었다가, 이내 영화평을 확인해보곤 내일 보자고 했다.

그를 만나러 갈, 다음 날 아침은 조금 늦게 일어났다. 주말에 허용한 여유이기는 하나, 며칠 전의 새로운 다짐대로 하자면 평일과 다름 없이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금요일 저녁을 그냥 보내기 싫은 마음이 다음날 새벽까지도 잠을 못 자게 했다. 앱으로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해보니 1시 정도였다. 동생은 회사에 다녀 와야 한다며, 오거든 집에 있으라고 비밀번호까지 알려주었다. 그냥 밖에서 보자고 하니, 녀석 역시 전날 늦게 잠들어 좀 더 수면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앉아서만 갈 수 있다면 지하철은 최고의 글쓰기 및 독서 장소였다. 특히 휴대폰을 이용하여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다는 데에서는 교통수단을 오래 타는 것을 기대하기까지 했다.

동생 집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온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며 누워 있었다. 그다지 하는 일이 없어도 편안했고 장소를 바꾸니 하루를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날에 느끼던 죄책감도 덜했다. 그저 그냥 이렇게 선풍기 바람에 누워 잠들고 일어나 냉장고에 든 간식을 뜯어 먹고 또 누워서 빈둥대는 것조차 동생과 있으면 편했다. 힐링이 되는 게으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이렇게 하루를 보내기도 오랜만이었다. 아무런 생각조차 하기 싫어 그저 클릭 몇 번으로 유튜브를 보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조차 없었다. 어쩌면 이게 죽음과 삶의 완벽한 중간지대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만큼 무기력에 가까운 게으름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삶에 의욕이 빠지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해보자, 열심히 살아보자, '~해 보자!'라는 적극적인 행위와 노력이 없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비웃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많은 정신적 노력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선택이나 결정 그리고 그에 따른 노력을 우리는 자유와 책임이라고 한다. 그 자유는 신체의 자유도 있지만, 판단과 행동의 자유도 있다. 나는 지금 신체의 자유로움 속에서 어떤 생각하기조차 멈추는 선택을 하고 있다. 그 안에는 적당한 쾌락이 있으며 삶의 고통이나 미래의 걱정 따위는 가려줄 만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말 오늘만큼은 일하지 않아도 되며, 어려운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며, 그저 즐거움만 있었다.

이런 자유만을 추구하면 안 될 까닭이 있는가? 걱정하고 불행해질 권리마저 우리가 가져야만 하는 것인가? 나한테 이곳에서의 하루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하루였다. 동생 때문에 따스한 온정도 느꼈다. 이런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 중에는 진정 「멋진 신세계」를 구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소마(soma)¹' 대신 컴퓨터 게임으로 자신만의 쾌락적 세상을 구축한다. 그러나 나와 동생은 이 세상이 오래갈 수 없음을 안다. 주말이 끝나면 우리는 원래 세상으로 복귀하여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 것이다. 우리 뇌의 어느 한 부분을 완전히 없애, 생각한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기 전까진 우리는 그런 삶이 결코 옳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

왜? 무엇이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가? 왜 불행해질 권리마저 요구하는가? 그것은 또한 내 정신의 자연스러운 욕구로부터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피해갈 수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타인과 비교됨에 따라 혹은 교육받음에 따라 생각하는 것인가? 가령, 모든 사람이 주말뿐 아니라 평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 것인가?


저녁 9시가 되자 동생과 나는 밥을 먹으러 나갔다. 샤부샤부에 칼국수를 먹으니 맛은 있었으나 웃으면서 동생에게 엥겔지수가 너무 높은 건 아니냐며 핀잔을 주고 계산서를 들고 직접 계산을 했다. 나는 먹을 것에 돈을 많이 쓰는 것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돈도 없을뿐더러 먹을 것에 지나치게 돈을 소비하는 게 아까웠다. 어쩌면 내가 운동과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이 먹을 것에 돈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니 동생이 웃었다. 동생은 샤부샤부에 칼국수에 볶음밥까지 먹더니 거기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해 더 먹었다.

식당을 나오면서 자신의 왕성한 식욕에 대한 일화로 어느 무한 리필 국숫집에서 4그릇을 먹고 더 먹으려 하니, 그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먹방을 찍느냐고 물어봤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생을 보면 키는 크지만 마른 체형인데 그 많은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근처 코인 노래방으로 가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예술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형태이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술가의 생각과 감정을 예술 형식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현대의 예술은 예술가의 생각을 배제하고 표현된 예술 형식을 전적으로 관람객에게 의지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극대화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예술가의 의도를 존중하며 그가 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피려 노력한다. 음악 예술은 작사가와 작곡가라는 예술가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시연하는 별도의 가수와 연주자라는 전문가가 존재한다. 가수는 작사가와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자신에 스타일로 노래를 완성한다.

음악 예술의 흥미로운 점은 악보와 가사를 토대로 비전문가들이 자신의 스타일로 비교적 쉽게 모방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를 할 때 예술이라 의식하기보다 그저 재미있기에 그 행위를 한다.

음악 예술 중 특히 따라부르기는 독서와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감정을 담는 것에서는 시나 일부 소설과 유사하다. 작가는 시나 시적인 소설에 자신의 감정을 담기를 바란다. 그리고 독자가 그것을 읽고서 그 감정을 헤아려 주기를 바라며 작품을 완성한다. 즉 자신의 주관적 경험이나 생각과 결합하여 해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노래 부르기 역시 음악가가 원하는 것이 음악적 기교를 제외하더라도 이러한 독서 행위와 비슷한 면이 있다면, 노래를 부를 때 감정을 담아 부르기를 진정 원할 것이다. 그 감정은 누가 가르쳐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가슴 깊이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을 느끼고자 할 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영은이가 메신저로 매번 보내주는 자신의 재즈 댄스 영상에서도 말이다.


우리 삶을 진정 예술이 되게 하려면 그 삶 가운데 접하는 모든 것들에도 감정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바로 생각하기이며 삶 속에 닥칠 불행마저도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다.



¹ 소마(soma)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나오는 불행한 감정을 막는 마약으로 국가에서 국민에게 지급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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