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예술가의 도덕성 / 행복의 추구와 불행할 권리.

나의 일상 여행기. (59)

by Chris
귀를 자른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1889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아침부터 뭔가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는 것처럼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어제 새벽에 분식집 이모에게 바쁠 때 연락을 주면 도와주겠다 말하고 전화번호를 주고 나서부터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화번호를 주기 전에 이모가 저녁에 바빴단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바쁘면 전화를 달라고 했고 그 말에 이모는 번호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저번에 줬을 텐데? 예전에 나한테 전화했었잖아?" "그건 낮의 이모인가 보지? 네가 언제 나한테 줘?"
저녁의 이모는 이렇게 역정을 내듯 말했고 나는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내 번호를 적어주었다. 저녁 이모는 이상하리만치 낮 이모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전날 일이 있고부터 일어나서도 찜찜한 기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번호를 준 것에서 찜찜함을 느끼는 것인지 혹은 다른 중요한 일을 잊은 데서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이 아침까지 이어지자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고 나서 식욕이 사라지는 것처럼 마음에 해결되지 않는 찜찜함이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몰아냈다.



학교에 가니 상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을 좀 차리고자 세수를 하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마저 보았다. 책에서는 신경계 이상으로 '결손'이 아닌 '과잉'에 해당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신경계의 이상으로 우울하거나 얌전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쾌활해지고 행복하다고 여기게 되는 상황이 나온다. 우울한 상태에서 삶을 살던 사람이 신경계 이상으로 활기차고 건강한 삶을 살 게 된 것이다. 이들은 악마와 거래를 통해 젊음과 열정을 다시 회복한 파우스트와 같았다. 다만, 이것이 악마와의 거래가 아닌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라, 그렇게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아'진 것을 이상으로 느낀 것이었다.
김동인의 소설 '광염 소나타'에서처럼 방화를 저질러야만 천재적 예술성이 드러나는 한 작곡가가 문득 떠올랐다. 이는 타인과 그들의 재산을 해하는 범죄를 통해 창조성을 획득하는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 가령, 신경계의 이상이 어떤 천재성의 스위치를 켜버릴 경우 또는 넷플릭스 방송의 한 광고처럼 어느 날 머리를 다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그리고 그에 따른 어떠한 대가가 없다면 이로써 그들은 좋은 것 아니겠는가? 이와 더불어 혹 마약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력이 깨어나는 경우라면,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더군다나 그게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만 행했으며 오로지 예술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면?
가끔 뉴스에 보면 마약을 한 예술가들이 고개를 숙인 채 국민에게 사죄를 구하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이들이 결코 자신의 예술적 천재성의 문을 열고자 마약을 활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또한 결코 혼자서만 즐겼으리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또한 그 덕분에 예술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 내고 당신들 또한 감동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어떤 답변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까? “법은 모든 국민이 지키라고 있는 것이며 현재 사법체계에서는 당신은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당신의 예술성은 존중하나 마약 때문에 그 예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할 근거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당신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라고 해야 할까?
혹은, “현대의 예술의 가치는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가치도 함께 포함됩니다. 당신의 작품을 보는 관객은 당신의 예술을 현재의 사회구조에서, 자신과 똑같이 법률적, 도덕적으로 제한된 상태에서 예술 활동을 펼쳤을 것으로 기대하고 예술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예술을 창조했고 이는 결코 옳은 방식이 아닙니다. 물론, 이미 세상에 태어난 예술품은 당신을 벗어난 개체로 인정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당신의 죄를 감량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해야 할까?
예술가는 자신이 창조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뛰어나다고 해서 예술가의 도덕성마저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둘을 별개로 봐야 하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현대 예술작품의 가치는 예술가가 살아 있거나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망각하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은 한, 그들의 평판과 함께한다. 그 까닭은 작품의 명성이 그들에게 부와 명예를 주기 때문이며, 그들의 명예가 또한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법과 도덕이라는 잣대는 시대의 통념에 따라 변화하며 사람들이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도덕성 역시 이에 따라 변화한다. 예술은 미래의 것에 닮았을지 몰라도, 예술가는 현재적 통념의 공간과 시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오후에 글을 쓰면서, 상윤이가 불현듯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행복의 추구는 불행의 가장 주요한 원천 중 하나."라는 에릭 호퍼의 말을 인용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얼마 전에 일기에도 썼던, 불행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그에게 멋진 신세계의 말을 인용하며, 항상 쾌락과 행복감만이 있는 세상과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반대 세상 가운데 어느 세상이 더 행복한 세상인지 물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소마’를 먹는 세상에서는 불행이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불행을 느끼지 못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적어도 ‘행복을 추구’해도 불행해지지 않는다.(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불행할 권리 자체를 박탈한다.) 그럼에도, 야만인은 불행할 권리를 요구한다.
추구라는 말은 좇는다는 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행복을 좇을 필요가 없다. 마치 원할 때 할 수 있는 수음과도 같다. 그가 불행할 권리를 달라고 한 것은 불행의 상태를 인지함에 따라 스스로 행복을 좇도록 노력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에서 불행한 가정이 돈, 사랑, 명예 등등 어떠한 불행할 수 있는 요인에 대하여 문제를 인지하고 자각함으로써 불행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불행을 인지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에릭 호퍼의 말을 곰곰이 뜯어보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게 깊어지면 현재 상태가 불행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야만인의 입장에서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소마를 먹지 않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달라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수음과도 같은 쾌락이 아닌 진정한 행복의 추구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 행복해지려면 불행한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것인가? 삶의 괴로움을 알아야 행복도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길 위의 철학자라는 에릭 호퍼의 '삶의 궤적'을 생각할 때, 저 말의 본뜻은 도교나 불교적 의미에서 '안빈낙도'와 유사할 것이다. 그 자신은 가진 것이 없어도 삶에 만족하는 것처럼, '계속 미래에 얻기를 기대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현재의 상태에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불행의 상태 자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도 아니고, '행복의 추구'라는 말이 알약 하나로 쉽게 얻어지는 '쾌락'과 동의어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 말은 같은 행복과 불행이라는 말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뽑아 동일시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에도 배울 점이 있다면, 과연 안빈낙도적 삶이 자기의 현 상태를 만족하는 삶이라면 소마를 먹고서 자기의 계급과 상태를 만족하는 것도 일종의 안빈낙도적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여하튼 거칠지만, 상윤이와 헤어지면서 이 생각이 궤변에 가깝다는 생각과 더불어 같은 추상적 단어라도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 언어를 보면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왜 실증 가능한 것만을 철학적 사유로 취급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호퍼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추구가 멋진 신세계에서 추구하는 행복과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오히려 김영랑의 시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혹은 안빈낙도의 의미에 가까우며 소마로부터의 행복은 마약으로서 느끼는 행복감(이에 더해 죄의식조차 없다면 더욱 유사하다.)과 같은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행복의 감정과 추구이며 언어로는 같은 단어라 실증 가능한, 혹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의 사례로서만 명확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또한, 호퍼의 경우 논의의 중심은 현 상태의 불행함에 있으며 멋진 신세계에서 논의의 중심은 선택의 자유에 있다.

참고로 이 멋진 신세계를 SF 적으로 영화화한 것이 바로 매트릭스가 아닐까 싶다. 이 매트릭스 세계에서 네오는 선택을 강요받으며 한쪽 세계는 가상의 세계이나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고 다른 한쪽에는 실제이나 시궁창 같은 고난, 불행이 있을 것임을 안내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결국 야만인과 마찬가지로 불행할 권리를 택한다. 이는 자신이 가상의 허황된 세계에서 행복을 얻기보다 불행하더라도 실존할 수 있는 권리를 찾은 것이다. 마치 소마를 먹고 불행이 뭔지 조차 모르는 것은 그저 이미지 속 가상의 세계에서 사는 것밖에 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불행할 권리는 나라는 존재가, 사회가 주는 소마와 같은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가상의 세계를 떠나, 오롯이 나를 찾는 것이다. 약발이 떨어지고 나면 진짜 현실은 지옥이고 절망이며, 그동안 내가 보던 것은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종교 시대에는 종교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로부터 인간은 종교적 행복감에 심취해 있었고 그것이 해체되는 순간 붙잡을 게 없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의 자리를 자본주의나 여타 다른 뽕(?)들이 차지하고 다시 인간은 그것들이 주는 교리를 통해 행복감을 얻는다. 그 교리 에서는 새로운 천국의 노래만 있을 뿐 불행할 권리는 없다. 열과 힘을 다해 아직도 남아 있는 종교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리에 봉사해야만 할 뿐이며, 이들은 그로부터 행복을 약속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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